기타

작은 음반

by 최병우 posted Oct 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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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 진공관과 아날로그 세계에 들어와 많이 헤매었고, 헤매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 고마운 경험들을 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기계에 대한 재능과  관심의 한계로 아직도 초보를 부끄러워하지도 탈출하고픈 욕구도 없다.
오디오라는 기계와 그 운용에 대한 고수들의 경험담과 논쟁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여행이다.
다만 그들이 접전 후 상처받는 모습은 안타깝고 위로해주고픈 마음이나 기계에 대해 그만큼 모르니 싸움판에  끼어들기가 참 거시기하다.

초등학교 시절, 스피커(아마도 6.5인치) 하나가 없는 허접한 전축이 우리 집에 들어앉는 인연을 만났다.
특유의 웅~ 소리와 함께 세라믹 바늘이 끼인 카트리지를 낡은 \'레코드판\' 위에 올려놓으면 부욱 부욱 하는 잡음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고, 이는 주변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였다.
중 2 때인가  영화 스잔나를 본 감동으로 없는 돈을 털어(그 때 우리 또래는 용돈 개념이 없었다) 7인치  영화음반을 샀다. 그 당시엔 모든 게 풍족하지 않아 판 몇 개만으로 아침 저녁 들었고, 그 스잔나 판도 수백번은 듣지 않았을까 싶다.

한 10년 쯤 전  가정용 트랜지스터 오디오로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데 어느 순간 거슬리더니 나중엔 듣기가 몹시 거북하였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 전 10여년 현장에서 음악을 다루던  경험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소리와 현장음을 기준으로 한 힘든 여행.
이제는 80% 쯤 만족을 느낀다. 그러니 관심의 중심이 음악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것 같다.

어젯밤. 장기하의 \'싸구려커피\' 등을 7인치 음반으로  들었다.
한 면에 한 곡이 있어 노래가 끝나면 침상에서 일어나 몇 발자욱 걸어가 다시 바늘을 올렸다. 40~50분씩 즐길 수 있는 LP들 사이에 있는 몇 장의 7~10인치 음반.
문득 이 음반이 소중한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축음기도 오디오도 모두 1~2곡 듣고 바늘을 다시 올리곤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LP만 해도 한 번에 5~6곡 또는 20~30분을 듣는다. 욕심이 커진 것이다.
그 어딘가 음악 생활의 원형이 있다면 아마도 한 곡 듣고 흥에 흠뻑 취하는 그런 시간과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 옛날 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고 또 들으면서도 같은 얘기를 또 조르던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