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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박일남님댁 방문기

by 김준석 posted Mar 0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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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 아주 쇼킹한 체험을 했습니다. @.@

드디어(!) 박일남님의 댁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역시 소리전자 회원이신 김화영님과 같이 말이죠.

역시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 이제서야 비로소 평판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평판형 스피커는 저역이 모자라고, 대편성은 무리이고, 그래서 소출력 3극관 앰프에 물려서 실내악이나 듣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 겁니다. 거의 '정설'이라고 봐야죠.

그런데 이게 정설이 아니었습니다.

박일남님의 댁에서 들어본 스피커는 12인치 우퍼 달랑 하나만 달려있었는데, 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저역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평판은 높이 2미터 30센티, 가로 1미터 30센티의 크기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시스템(물론 많이 들어보지도 않았지만...^^;;)들 중에서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저역의 임팩트가 강한 시스템은 없었습니다. 비트가 강한 곳에서는 정말 '가슴을 때리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가슴을 때립니다. 특히 오페라에서 펼쳐지는 그 광대무변한 사운드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표현이 상투적인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제가 위에 쓴 얘기는 비유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참 이상하죠? 제 스피커의 우퍼도 12인치인데...--;; 제 스피커하고 비교해보면 스케일이 최소한 10배는 더 되었습니다.

같이 계셨던 김화영님도 15인치를 더블로 장착한 알텍을 가지고 계신데, 도대체가 이건 12인치 달랑 하나로 어떻게 15인치 두 개를 능가할 수 있는지 내내 신기해하시더군요. 상당히 고뇌하시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  

박일남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게 바로 독일제 유닛과 평판의 위력이라고 합니다. "평판은 소편성"이라는 세간의 정설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박일남님이 말씀하시길 많은 분들이 평판의 가능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계신데, 평판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스피커의 형태라고 하시더군요. 단지 공간이 문제라서 그렇지 인클로저를 쓴 스피커에서 느껴지는 한계가 평판에서는 모두 해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처음엔 이런 말을 반신반의했으나 실제로 확인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평판을 만들어서 좋은 소리를 듣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 이 말씀이 의외였습니다. 그냥 판에다가 구멍만 뚫으면 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찬찬히 말씀을 들어보니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한데다가 튜닝이 까다로워서 많은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더군요. 평판의 세계가 이렇게 심오한지 전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평판이야말로 정말 원시적이고 단순무식한 스피커 형태라고 생각했던 저의 선입관이 싹없어지더군요.  

아무튼 평판은 참으로 위대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저의 길은 정해졌습니다. 저역은 12인치 하나로 만든 평판에 중역 혼과 무지향성으로 트위터를 한 6개정도 달아보는 겁니다. 이 시스템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저의 귀동냥을 종합해본 결과 이러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아마 네트워크 만들다가 지쳐서 쓰러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전 이렇게 할겁니다.

박일남님 역시 오디오 라이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각 기기의 특성을 머리 속에 메모리 시켰다가 자신만의 시스템을 머리 속에 그려서 실행하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가장 지름길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귀동냥이다 이겁니다. 뭐 재력이 너무 강해서 주체를 못한다 그러면 별별 기기를 다 사서 써보면 되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습니까...    

게다가 또 한가지 감탄한 것은 박일남님의 음악에 대한 해박한 식견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음악과 오디오 중 한 분야에만 쏠리는 경향이 있는데, 박일남님은 둘 다 끝장을 보셨더군요. 저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최소한 음반 랙에 어떤 음반이 꽂혀있는지를 보면 그 분의 음악적 수준(좀 건방진 표현인가...--;;)을 알 수 있는데, 음반들을 딱 보자마자 '아! 이분한테는 일단 한 수 접고 들어가야겠구나...'하는 생각이 확 들더라구요. ^^;; 역시 잠시 후에 음악에 대한 얘기를 술술 풀어내시는데, 오디오를 이 정도로 하시는 분들 중에서 음악에 이 정도로 해박하신 분은 지금껏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런 분이 계신다는 소문도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횔덜린에 심취해 계시고, 칸트와 하이데거를 그것도 산 속에서 섭렵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정말 보통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외모부터가 '도인 그 자체'입니다. 약간 유식하게 말하면 '도인 an sich'랄까...^^ 그리고 실제로 도인이세요. 또 여러 가지로 나이가 어린 저한테는 앞으로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얘기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고, 어제 저의 체험은 단순한 오디오에 대한 차원을 넘어서서 음악과 인생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실제로 거창했거든요.

아무튼 너무너무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신 박일남님께 감사드리며, 동행하셨던 김화영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김화영님과는 맛있는 올갱이국으로 식사를 같이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요, 오디오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완전히 '중증' 매니아시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다방면에 능통하신지... 특히 사진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던데, 기회가 되면 정말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옛날 카메라로 찍는 사진에 관심이 있거든요. 제가 나중에 어디 가더라도 원거리로 레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사하시면 가지고 계신 알텍과 파트리샨의 소리를 꼭 한 번 듣고 싶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또 두 분에게는 거의 아들 뻘인 저를 두 분 모두 거리감 없이 편안하고 가깝게 대해주신 점에 대해서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아무튼 정말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