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

해상력에 대해 다시 생각함

by 윤영진 posted Mar 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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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오디오의 해상력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던 점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탈도 잘게 부숴 나가다 보면 결정의 구조적 특질을 잃고 분말이 되고,
하나하나의 입자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운 고령토도 본래는 바위나 자갈부터 시작된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해상력이란 쇠라의 점묘화처럼 소리의 입자(실제 있기 보다는 이미징의 산물)가 하나하나 살아 나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전에는 "해상력이 좋은 시스템"의 소리란 고역부터 초고역에서 얇은 은박지 사각거리는 듯한, 미국의 오디오파일들이 "Crispy하다"고 말하는 그런 것을 추구했습니다.

대개 이런 소리는 중고역을 살짝 낮추고, 고역부터 초고역 부근을 살짝 부스트해 주었을 때 듣기 쉽습니다. 오디오 메이커들 중에 이런 주파수 커브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곳도 있고,
BBC의 소형 모니터 스피커들도 이런 커브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네트워크를 다시 만들고, 3일간의 연휴를 집에서 방콕하면서 오랜만에 시스템 튜닝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동안 기기들이 들락거리고 몇 가지 잘못 만져 놓은 탓에 밸런스가 무척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력이 통했는지, 지금까지 제가 튜닝했던 내 시스템의 소리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까지 음을 끌어 올렸습니다. 물론 기기를 엎 그레이드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있는 것들의 컨디션과 매칭과 밴런스를 올린 겁니다.

다른 무엇보다 초고역 배음에서 "배음을 가장한 잡소리"를 지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프리와 파워앰프의 전원임피던스를 줄이고 고주파 노이즈를 최대한 줄였습니다.
마침 네트워크 작업을 하느라 준비했던 상질의 대용량 필름 콘덴서들이 좋은 재료가 되었습니다. 파워앰프는 한 쪽 채널에 11uF 2단, 끝단에 22uF로 줄여 총 필터 용량을 44uF로 내렸습니다.
초단 디커플링단에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전해콘덴서도 역시 상질의 필름 콘덴서로 바꿨습니다.

대충 원했던 작업이 끝난 후 미리 선입견을 가졌습니다.

  "아마, 날카롭고 크리스피하고 뻗뻗한 음이 날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너무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서 "전기를 먹은 일렉트릭 기기"를 통해 음이 나온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냥 어쿠스틱한 음이 나왔습니다.

평소 약간 고역이 부스트되게 들었는데 그런 느낌도 사라졌습니다.

바이얼린, 피골로, 스내어 드럼, 신디사이저 등등 고역을 테스트하기 적당한 소스를 여러번 들어봤습니다.
결과는 해상력이 훨씬 더 좋아졌다는 겁니다.
전에는 바이얼린의 초고역에서 음이 부서지듯 끊겨서 지나간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지금은 매우 가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낍니다.

하나하나 분석적으로 들으면 전에 안 나오던 소리들이 눈에 띄게 많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해상력이 월등히 좋아진 겁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들어보면 해상력이 낮아졌다고 느낍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용각산 선전 문구가 떠오릅니다. 흔들어도 소리가 안난다는......

결론적으로, 해상력이 극도로 추구되면 음의 입자감이 사라져서 부드럽고 매끈하면서 자연스럽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저 가수는 호흡법이 나빠서, 부루지한 재즈곡의 뒷 부분을 너무 일찍 끊어버리는구나!"라고 혹평을 했던 경우도, 내 오해였음을 알았습니다. 들리지 않던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소리가 아니었고, 마이크로부터 입을 90도쯤 스윙시키면서 거리를 띄우며 내는 말 그대로 호흡에 의한 기압의 변동이었습니다.

아직 시스템은 부족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큰 깨달음을 주말 연휴 동안 얻었습니다.

가장 좋은 소리는 "가장 오디오적이지 않은 소리"라는 점을......
음에서 전기 냄새를 지워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