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를 넘어서다.

by 박차열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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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그런가 요즘은 뜸한데

가끔 빈티지와 하이엔드의 오디오 우열에 관해서 논쟁이 이어질 때

첨단과학을 구가하는 현대에서 빈티지오디오들이 요즘 생산되는 신형오디오들에 비해

옛것에 대한 향수어린 시선 외에 즉 골동품 가치 외엔 머가 있냐고 상대 쪽에서 호되게 디스할 때에

빈티지애호 쪽은 대응할 만한 실체적 증거나 변명거리가 부족해서

이런 논쟁에서 수세로 밀리는 장면을 목격할 때가 많았더랬습니다.

빈티지오디오 예찬 쪽에서의 추상적인 단어들의 나열로는 오만한 상대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어서
마치 형사사건에서 기소나 공소를 유지할 만한 물증들이 부족한 것처럼
이런류의 논쟁에서 늘 수세로 밀리는 현실을 봅니다.

 

 

 

 

재생하려는 음을 구성하는 고역 중역 저역은 물론 음장감, 정위감 등의

오디오가 가져야하는 기본조건의 일정한 스펙을 충족헀다는 가정 하에

눈으로 보거나 계기로 측정할 수 있는 것들 외에 정녕 다른 뭐가 또 있을까..

있다고 동의한다면 나는 그것을 막연한대로 음의 늬앙스라고 표현합니다.

   

 

얼핏 뜬구름 잡는 듯한 실체 없는 음의 격이나 늬앙스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주를 듣거나  오디오로 들을 때의 인간의 인격이나 감성에만 존재하는 것

알파고가 제아무리 무한에 무한까지 업그레이드 되어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오직 인간의 인간다움에 있는 것

그것을 그래픽이나 계측자료 따위를 내어밀면서 실체를 증명해 보여달라는 부류는 그쪽이 반푼이거나 병ㅅ인 것.

사랑도 움직이는 거라는데 나도 모를 내마음 내감정을 어따대고 보여달라니 말라니

찐따거튼 주접을..



오디오가 가져야 할 기존조건을 충족한 일정한 격을 넘어선 특정한 기기가 있다고 한다면

제 경우엔 클래식의 서정적인 묘사의 곡이나 재즈의 멜랑콜리한 음원에서 그것의 맛을 저마다의 방식들로 표현해 낼 때

다른 여러 조건에 우선하여 그 기기가 해석하는 늬앙스의 순도나 격에 따라 대략의 가치를 산정합니다.  

그것이 어느만큼 충족되면 비로소 다른 걸 체크하는 식의. 당시의 기기 제작자들이 추구하려던 음의

그 오리지널리티를 이해하려 애쓰고 짐작해보는 작업이야말로 돈이 되고 또 저의 일입니다.

 

 

빈티지오디오는 그 수명을 다하였고 고물 즉, 옛 유물로서의 가치만을 지닌다는 일부의 견해는

지금에도 여전히 싱싱한 채 현역으로 뛰고있는 1930년~1960년대의 인류사의 획을 긋는 명기들을 듣노라면

그 오디오들의 제대로된 실력을 단 한번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고백에 다름아님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저의 짧은 견해로 그 오디오들의 음감, 그 늬앙스는 그 자체로 이미 더 손댈 것도 덧댈 것도 없는 완성이어서

감히 짐작컨데 언젠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끝내 그 격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늘 겪는 풍경인데

나름 오디오깨나 섭렵했다는 레테르, 스펙부터 따지는 유저들.

소리 잘나고 대역별로 꽤 잘 재생해 내고 고역 찰랑거리고 중역 두툼하고 저역 빵빵히 나오는 걸 좋은 오디오라 한다면

요즘 하루가 멀다고 업그레이드 되는 자동차 기본옵션으로 장착되어 나오는 카오디오로도 충분할 듯.

그들의 가치판단이라는 것이 그것과 별반 다를게 없을 것임으로.


 

인류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그들이 현실에서 부유하고 유복했더라면 결코 인류역사의 궤를 관통하는 걸작이 잉태될수 없었을지도.

그들의 삶이 내쳐 비루하고 지난하여서 오히려 반대급부로 영혼을 부른 어떤 영감의 순간이 조성되었다고나 할까

마치 진흙바닥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거처럼.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든 혹은 인류중 어떤 인간의 영감에의한 결과물이든

인류에게 남긴 유산의 결정체가 그것이 철학이든 미술이든 어떤 구조의 미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고

고호든 램브란트든 푸시킨이든 베토벤이든 그들이 우리에게 표현하려하고 보여주려는 것의 본질이 중요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가끔 그들이 가리키는 것에 시선을 주려하기보다 그 손가락에 묻은 것들에 집착하지. 


 

음의 진정한 구현의

음의 늬앙스, 그 격을 들여다 볼 때

어쩌면 지금의 삶이 윤택하고 여유로운 유저는 일정부분 빚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정부분 삶의 온전한 부분을 기꺼이 지출한 먼저 간 이들의 역할도 있었을테니.

이곳의 오디오관련 일을 하는 나를 비롯한 다수의 변절한 자들을 제외하고서

그것이 비록 자기연민이나 자기위안의 격 낮은 감상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을 갉아먹는 절실함과 절망. 그 처연함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걸작을 탄생시킬 수 없는 예술가 그들처럼..


 

 

 

고향이 남도 쪽인데

수십년 오디오질을 하면서 그 쪽으로 딱 2번 물건 보내 봤습니다.

그것도 한사람은 쌍계사 절 스님이었고 또 한명은 관공서에 임직한 외지인이었다는..

오래전 일인데 고향에서 문화원장직을 갖고 있는 고향 선배와 이런저런 얘기 중에

내심 선배의 자랑비슷한 어투가 그만 거슬려서 언급한 그 얘기를 꺼내면서

음악, 오디오가 뭔지도 모르는 불모지의 살다살다 이런 문화적으로 척박하고 야만에 가까운 곳에

뭔 지방문화 어쩌구 쓰잘데 없는 자랑질이냐며 험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지나

괜히 혼자 고향 주변을 어슬렁 거리면서 며칠을 밍기적거릴 때

구례 곡성에서 하동 남해 쪽으로 섬진강 국도를 자동차로 넘어오면서

강둑에 이어진 논밭과 과수원과 강의 빛과 풍광을 내려다 보면서

어쩌면..

어쩌면 이곳 사람들은 굳이 바하를, 쇼팽을, 슈벨트를 모르더라도

레지 나오는 시골 허름한 다방의 유치찬란한 뽕짝에 발을 걸터있고 일요일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입을 헤벌리고 있어도

어쩌면 그들의 결대로 살아온 생이, 세월이 자체로 클래식이었지 않을까..

해질녘 구례에서 광양쪽 섬진강을 지나면서.

 

 

얼마전 인터넷에서 그래비티라는 영화를 다운 받았는데 딴건 기억안나는데

주인공 남자가 여잘 위해 그녀와의 이어진 생명선을 잘라내고 우주의 깊은 어둠속으로 끝없이 멀어져 갈 때

그 아득함 그 막막함이 왠지는 모르겠는데 아.. 저건 나로구나! 했슴.

글타고 이 나이에 주인공 남자한테 감정이입된 건 아니고.^^


 

음이 갖는 서정적 표현이나 페이소스에서 나의 길을 방황하고

무릇 인간이 갖는 고독이나 생에 대한 연민, 나아가서 모를 우주 어딘가서 내가 내 영혼과 조우하는 때

우린 음악을 듣는다고 하고 또 듣기를 마치는 거.



 

 

해서 음악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건 구원일지도..


과거는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가

언제든 사물을 통해 되살아난다.

순간적인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한 시간에 도달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A la recherche temps perdu

-de M pro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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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삭예정 태클사절 악플사절^^
뻘글은 눈치봐서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