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IIX-II (무거운 행복)

by 김명기 posted Sep 2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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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IIX-II (무거운 행복)

첫 번째 소식 - 멧돼지의 복수

아이고 야야, 진돌이가 난리 났다카이.
아니 왜요?
맷달 전에 진돌이가 멧돼지 ㅅ ㅐ 끼 안잡았드랬나?
그랬죠.
그란데, 그 에미가 안이자묵고 있었나보드라. 어제 밤에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카꼬, 진돌이 옆구리가 짝 찌자지고 피투성이가 됐다카이.
죽지는 않았나요?
죽지는 안했는데, 개집에 숨어가꼬 불러도 안나온다카이.

고적한 산골. 이곳에도 매일 같이 드라마는 있다. 개와 멧돼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전쟁 중이다. 이번에는 개가 졌다. 가엾게도 겁을 단단히 집어 먹었나보다. 그러나 진돌이가 좀 더 자라면 그때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진돌아 힘내라.

두 번째 소식 - Nessun Dorma

나는 산골에 산다. 대구 팔공산 가산산성 자락이다. 공기가 무척 맑은 곳이다. 저녁이면 불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 반딧불이 어지럽게 나른다. 밤의 팔공산은, 산짐승과 풀벌레와 신비와 어둠의 영토다. 나는 그저 손닿지 않는 눈앞의 신비와 비현실을 바라보는, 초대 받지 않은 이방인일 뿐이다.

일이 생길 때면 늘 조그만 고물 마티스를 털털거리며 산길을 내려가 동명사거리를 지나, 칠곡으로 나간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숲길을 지나, 조그만 콘크리트 다리를 지나, 79번 지방도를... 아니! 아니 다시.

나는 조심하지 않으면 단단한 감이 머리를 치는 감나무 아래를 지나, 호두가 여무는 정원을 지나, 서둘러 핀 코스모스 길을 지나, 이제 막 이삭이 영글기 시작한 논 사이의 오솔길을 지나, 소곤소곤 수다를 떠는 실개천을 지나, 멀리 송림사가 내려다보이는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리고 있었다.

뽀송뽀송 마르기 시작하는 초가을 바람이 활짝 연 차창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와 앞머리를 날리고, 마음속의 우울한 기억들마저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그때, 가을 속을 내달리고 있는 그때. 생경한 가수의 음성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푸치니의 오페라 Nessun Dorma. 오 제법인데? 나도 모르게 볼륨에 손이 갔다. 길은 텅 비어 있었고, 가을은 햇살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Vinceroooo~ 라고 가수가 힘차게 클라이맥스를 노래할 때, 마침 나는 마침 산그늘이 차분하게 드리워진 푸른 동명 저수지 곁을 지났다. 조그만 마티즈의 창에서 가을 속으로, 벅찬 감동의 음악이 마구 흩뿌려 지고 있었다.

동명 사거리쯤에서 노래는 끝나고, 아나운서는 그 가수의 이름을 소개해 주었다. 폴 포츠라고. 아하, 가끔 TV에서 지나치듯 보던 그 못난이. 어째서 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의 과거를 자꾸 이야기 한다. ‘왕따였고, 평범한 휴대폰 판매원이었던’ 그게 어쨌단 말인가? 분명히 왜곡된 시선을 지난 광고나 프로듀서들이 만들어낸 마케팅 전략일 것이다. 현대판 신데렐로.

처음에 우리 모두는 실제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애초엔 젖 빠는 아기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가,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결과를 손에 잡히게 보여준 극소수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가 부른 Nessun Dorma는 산골마을의 가을 도로에서 듣기에 너무나 행복한 노래였다. 그는 지금 좋은 가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일 나는,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CD 한 장을 사게 될 것 같다.

세 번째 소식 - 마음의 빚

갑자기 찾아뵈어야 할 분들이 많이 생겼다. 아니 그 표현은  정확하지가 않군. 예전엔 자주 찾아뵙고 인사를 나누던 분들을 자주 뵙지 못하게 되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걸까?  매주 금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주말엔 서울에서 승마교실을 하고 있다. 주중에는 대구에서 말을 돌본다. 나는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또 승마교실도 일이다보니 업무상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눌 분도 많다. 주중의 하루나 이틀을 그런 분들과 만나 협의를 하다보면, 그저 마음으로 정을 나누던 분들께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아무래도 점점 현대인이 되어 가나 보다. 나와 마음을 나누던 분들은 분명히 말씀하실 것이다.

“그건 잘된 일이에요. 김대장도 나이가 있는데.”

나는 가끔 섭섭하다. 그분들도 물론 자주 인사를 못 드리는 내게 섭섭하시겠지만, 나는 그분들과 한담과 고사와 삶의 지혜를 나누고 귀동냥을 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 시간이 그립다. 몹시 그렇다. 어설프게 바쁘기만 한 내 일상이, 마음의 빚이 쌓여가는 지금의 상황이  내 스스로에게 섭섭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시간은 일회성이며, 빛만큼이나 직진성이 강하다. 나는 이제 내 삶에 책임을 져야 하고 사랑하는 아내도 있다. 게다가 앞으로 나의 지인들과 술잔을 나눈다면, 비록 작고 초라한 곳이라고 해도 내 공간에서 내 호주머니를 열어 그 분들께 마음을 드리고 싶은 까닭이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다가 창을 여니, 휘황한 달빛아래 선 내 그림자가 조그맣게 드리워져 있다.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달을 보며 그리운 분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몹시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다시 그분들과 정담을 나눌 시간이 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지금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겠지.

네 번째 소식 - 얼굴이 변했다.

어? 면도를 하며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낯설었다. 설마, 하면서 좀 더 자세히 거울을 보았다. 앗, 정말로 얼굴이 변했다. 눈모양이 좀 더 사각형이 되었고, 오른쪽 눈은 쌍커풀이 외국인처럼 깊어졌다. 어쩌면 나이 때문에 눈두덩이 내려앉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은 드디어 내 얼굴까지 갉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은 여전히 30대 또는 20대를 드나드는데, 내 얼굴은 나 자신이 감당 못할 정도로 먼저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이러다가 완전히 낯선 사람을 거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시간 내에 말이다. 아직은 내 얼굴에 책임을 질 준비도 안 되었는데...

걱정 마요. 당신 숀 코넬리 같이 멋지게 늙어가시는데요, 뭘.

역시. 그래서 함께 늙어가는 조강지처인가보다. 아내의 위로에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다섯 번째 소식 - 무거운 행복

시간이 흐르자, 중상모략은 비에 젖은 잉크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소문을 만들어 내던 이들의 말을 믿지 않고, 부족한 내게 신뢰를 주신 분들의 덕이다. 들끓던 악의 어린 이야기들은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자네는 순진한 사람이야. 나는 자네를 알지. 그래서 그 일을 밀어붙인 것이고.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꾸준한 노력. 나는 자네를 얻고 싶네. 그래서 자네 곁에 좋은 인물들을 많이 소개할거야. 자네, 언제든 부르면 내 곁에서 일해 줄 거지?

선배님은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 한다. 나는 잔을 권해 감사를 표했다.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하나보다. 고맙게도 그간의 노력과 진실이 작은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

시간을 약으로 쓰는 사람과, 시간을 독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지요. 시간을 독으로 쓰는 사람들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는 자신을 보게 될 거에요.

나를 지켜보던 아우는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담백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이렇듯 나를 알아주고 나를 보살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려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예전 젊었을 때처럼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

나는 오랜만에 행복과 함께 하고 있다. 참 많은 시간과 대가를 치른 무거운 행복이다.

마지막 소식 - 겨울 예감

새벽부터 추워진댄다. 이제 가을은 겨울에게 밀려날 것이다. 계절은 가위바위보와 같이 순차적으로 서로에게 양보한다. 그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다툼 없이 시간 속에 영원하다. 자연, 순리, 조화. 계절이 오는 것도 순리가 계절이 가는 것도 순리다. 사람이 나서 자라는 것. 사람이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도 순리다. 순리 속에서 나서, 순리를 따르다, 순리대로 가는 것. 창가에 서서 나는 어둠 속의 가을을 바라본다.

차가운 바람이 산을 타고 내려와 오두막의 덧문을 흔들어 댄다. 언덕 아래에선 소 울음소리, 말들이 푸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글어 가는 벼이삭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자그맣게 들려온다. 나뭇가지 사이로 별들이 흔들리는 밤. 나는 다가올 긴 겨울을 예감한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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