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IIX-I (인간실격)

by 김명기 posted Sep 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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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IIX-I (인간실격)

첫 번째 소식 - 산골 축제

“아아, 삐이이익~ 아아, 알려 드림다.”

오전 7시. 잠을 자기엔 어쩐지 너무 아까운 뽀송뽀송한 새벽. 초가을이 창을 넘어 솔솔 불어 들어온다. 가을보다 더 메마른 가슴 속에, 웬일로 문장 몇 개가 고여 들었다. 막 적으려는데, 계곡 아래에서 굉음이 들려온다.

“아아, 알려 드림다. 오늘은 추석맞이 동네 대청소가 있는 날임다. 어여 아침(식사) 해 자시고, 8시까지 동네 마을 회관 앞으로 모애주시기 바람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림다.”

온 동네 개들이 합창으로 따라하는 이 굉음이 3번 반복되고 난후, 계곡은 다시 적막한 초가을 아침으로 침묵한다. 개들도 고장 난 발동기처럼 털털 거리며 괜스런 울음을 멈춘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마당에 나간다. 조금 있으면 마을 회관 앞에 아침식사를 마친 동네 노인 분들이 한분 두 분 모이실 것이다. 평균 연령은 60대 중후반쯤 되겠지.

아침 햇살은 마을 골목길에 노랗게 쏟아지고, 널어놓은 고추와 깨를 피해가며 모처럼 활기찬 빗질 소리가 마음 담장 아래 웅성일 것이다. 청소가 끝나면 손두부 아주먼네에 앉아 오전댓바람부터 막걸리 추렴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매일 마주치며 평생을 함께 하는 얼굴들.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근심 없고, 변함없는 정지된 시간들. 계절만이 앞산에서 걸어와 천천히 뒷산으로 넘어가는 길목. 이 조그만 산골마을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동네축제다.

이윽고 개 짖는 소리가 완전히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 느린 소 울음소리가 풀피리 소리처럼 산골마을에 번진다.

두 번째 소식 - 인간실격

이번에도 못 내려가요.
아니 왜?

잠깐 머뭇거리다보니 오히려 생각보다 말이 먼저 퉁명스럽게 나가버렸다. 어머님은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렇게 답이 돌아오니 맥이 풀리신 모양이다. 수화기를 통해 좀 더 작아진 음성으로 느리게 말씀하신다.

제가 가면 말 밥 줄 사람도 없을거구, 그렇다고 며칠간 사람사서 쓰기도 그렇고.
하지만...
오고가고 녹초가 되면 내 몸도 그렇고, 만나서 술 마시고 돈쓰면 그건 뭐 좋은 일이겠어요? 차라리 제가 오늘 그 비용 보내 드릴게요. 제사에 보태 쓰세요.
그러냐?

앞뒤 귀가 딱딱 떨어지게 말하는 맏이의 말에, 서운함을 감추느라 더 조용해지시는 어머님이다. 그래도 이렇게 확실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더 나을 성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 자식 자꾸 전화하지 말라고 하세요. 술 처먹고.
그래? 아직도 그러냐?

지난 번 돈 좀 필요하달 때는 십 원 한 푼 못 보태는 놈이 뭘 잘났다고 이러고저러고 전화질이래요? 지 조카 학비도 못 보태는 놈이. 그리고 일이 없으면 막노동이라도 해야지. 지가 뭐라고 놀고먹고 게다가 술까지 쳐 먹어요?
니가 모르는 척 해라.

말리는 어머님 말씀에 갑자기 나는 폭발한다.

어머니. 이 어려운 세상에 생활비에, 애들 학비에, 집에 돈도 부쳐야지. 길에다 돈 뿌리고 술 퍼먹고 그럴 여유가 어디 있대요? 마주 보고 술 퍼마시면 뭐 뾰족한 수가 있대요? 아무 대책도 없이 무조건 오라고만 떠드니. 나는 뭐 안 내려 가고 싶어서 안 간대요? 일 제대로 자리 잡히고 손에 돈도 좀 쥐면, 곧장 내려오지 말래도 내려가지. 도대체 아무 대책도 없는 놈에 뭐라고 건방지게...

아유,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 말하마.
아버지한테도 잘 좀 말씀 드려주세요.
알았다. 내가 잘 말씀드릴게.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줄도 없는 전화기 양쪽에 매달린 모자(母子)의 심장은 둘 다 새까맣게 타버렸다. 나는 내가 지닌 돈 전부를 부쳐드렸다. 그래봐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호주머니에 남은 몇 푼으로 책방에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이걸로 추석 준비는 끝이다. 어쩌면 나 같은 인간의 이야기는 아닐까? 은근히 두렵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제 2박 3일만 지나면 이 소동은 끝날 것이다. 집에 가만히만 박혀있으면, 돈쓰고, 길에서 고단하고, 돌아 와서 아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합리적이다. 제기랄! 그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지?

전생의 원수가 부부가 된다고들 한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기대고 싶고 아무 말이나 막하고 자주 대하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많이 다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어머니와 나는 무슨 인연이었을까? 어째서 어머님은 평생을 나 때문에 속 썩이고도 큰 소리 한 번을 못 내시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이토록이나 어머님께 당당하고 못 돼먹은 아들이어도 되는 것일까?

오늘 저녁은 달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주에 달까지, 그건 너무 독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은 하늘 보기도 부끄럽다. 어머님께 말이라도 곱게 해드릴 것을. 나는 이제 이 죄를 다 어떻게 하지? 머지않아 어머님께 다 말씀드려야겠다. 너무 늦지 않게...

*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훨씬 더 독한 이야기였다. 다행이다. 나는 그래도 여태까지 빛을 보고 살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 번째 소식 - 소주 한잔, 블루스 한 조각

그리고
네.
너 이번 추석만 지나면, 운이 풀린대더라.
누가요? 아, 그 S여대 나온 점쟁이 아줌마가요?
응, 그전 까지만 조심하고 남하고 시비 붙지 말고, 그냥 좀 손해 본다하고 살면 곧 좋은 일이 많이 생긴대. 니가 일 때문에 속 끓이는 것도 다 알더라.

아마 내가 고향을 떠나 온 후 가장 많이들은 충고가, 바로 ‘남하고 시비 붙지 말고, 그냥 좀 손해 본다하고 살면 곧 좋은 일이 많이 생긴대’ 일 것이다. 그것도 바로 S여대를 나온 점쟁이 아줌마의 충고. 하지만 나는 늘 시비를 붙었고, 그때마다 손해를 보았다. 표면적으로 이 행성은 사기꾼, 거짓말쟁이, 배신자의 세상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죽기보다 싫다. 40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그렇다.

어쨌든 그 점쟁이의 말로 어머님은 어지간히 마음의 평화를 얻는 모양이다. 불같은 성격의 성미 급한, 어린 시절엔 모범생, 커서는 한때 제법 잘 나가다가, 도중에 인생 자체를 망쳐버린 큰 아들을 둔 어머님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복채는 대략 1만 원쯤이라고 하시지만, 그게 벌 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니, 복채에 대한 이야기는 어머님이 나의 정신 건강을 배려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알고 있다. 이번 추석날 아침에도, 나는 말에게 아침밥을 주고, 물을 주고, 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마방을 깔끔하게 치울 것이다. 바삭하게 마른 톱밥을 뿌려주고 난 후, 말들에게 알팔파를 떼어 주고, 말들이 맛나게 후식을 먹을 동안 나는 마방의 복도를 쓸어낼 것이다. 그리고 초가을 햇살을 어깨에 짊어지고 밥을 먹겠지.

아마 밥은 목을 꽉 메우며 간신히 식도를 넘어가겠지만, 그래도 나는 밥을 먹고 또 하나의 추석이 다가올 올 때까지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내년 추석은 올해와 다를 것이다. ‘내년엔 내 꿈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나는 다시 내가 원하던 삶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는 희망을 비수처럼 가슴에 품고 말이다.

무심한 달이 무척이나 밝을 오늘 밤. 명혜원의 청량리 블루스는 어떨까? 그 정도라면 괜찮겠지. 소주 한잔, 블루스 한 조각. 공허한 추석전야.

네 번째 소식 - 2년 동안...

정확히 2년이 걸렸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 태스크포스 팀을 만나 역설했다. 현재의 승마장 시스템은 안된다고.

"농협이 몇몇 승마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실건가요? 비용 대 효과를 고려해야 합니다. 승마는 반드시 대중화 되어야 합니다. 체험 승마장을 만들고, 안전하게 운영해서 전국의 초중고, 유치원생들이 두루 거쳐 가는 학습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나중에 이 시스템이 성공해서 각 지방마다 체험, 실습 승마장이 생기게 해야 할 것입니다. F.T.A. 시대의 농촌에 실질적인 새 산업을 주어야죠.""

그리고 1년. 나는 내 돈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던 곳에서 원고를 도용당했고, 모함을 당했고, 그간 승마대중화와 마필산업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왕래하던 곳으로 김명기가 잘렸다는 Fax가 날아갔다. 적반하장이라는 단어가 지닌 날카로운 아픔을 현실에서 맛보았다.

상대방에서는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법적 대처를 고려했으나, 시간이 아까웠다. 갈 길은 아직 먼데, 무지랭이, 사기꾼들과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었다. 농협에서 전화가 온 것은 7월이었다.

"국장님 오랜만입니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추진하던 일 계속해야지요."

이윽고 일은 깊은 잠에서 깨어 제 갈 길을 잡기 시작했다.

"그 후로 여러 사람을 만났지요. 그래도 처음부터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실제로 일이 성사되도록 노력해주신 분은 국장님 밖에 없더군요. 또 한 가지, 다들 일보다는 돈 이야기를 먼저하더군요. 국장님은 제대로 된 자료를 제시하며 일이야기만 하셨죠. 이 공사는 반드시 국장님이 컨설팅 해주셔야겠습니다."

아마도 이쪽은 상당히 보수적이긴 해도, 한 번 인연을 맺은 부분은 그리 쉽게 잊혀지지 않는 조직인가보다. 곧이어 14년 동안 농협의 축사시설 설계를 담당했던 두예건축사무소와 만났다. 함께 늦은 밤까지 토론하고 제안하고, 그래서 지금의 결과가 나왔다. 드디어 '농협안성목장체험슴마장조성공사'의 공지가 뜬 것이다. 두예의 직원들은 사무실에 침낭을 펴고 일했다.

이제 남은 기일은 80여일. 올 해 안으로  승마장이 완공되면, 그간 학교 운동장에서 열심히 승마를 배운 우리 찾아가는승마교실 학생들의 좋은 실습승마목장 겸, 팜랜드가 생기는 것이다. 곧 전국 초등학교의 승마교실 학생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기우뚱기우뚱 안성목장의 숲길로 들어서는 모습. 방목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

'야, 말이다.' 를 외치며 푸른 초원을 내 달리는 우리의 꿈, 우리의 미래-어린이들의 나비같은 발걸음과 흩날리는 미소를 그려본다. 더 나아가 승마를 배운 초등학생들이 전국의 들판과 농가형 승마장에서  말달리는 환상까지.

딱 2년이 걸린 일이다. 긴지 짧은 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교훈은 있다.

첫 째, 승마가 정식으로 전국 초등학교의 방과후 학교수업이 되었다.
둘 째, 대기업인 농협이 승마산업에 눈길을 돌렸고, 승마 대중화는 그 만큼 빨라질 것이다.
셋 째, 시련은 인간을 보다 강하게 만든다.

다섯 번째 소식 - 귀여워

따로 소개한 적은 없다.

잠시 자리를 뜨고 돌아오니
말과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말이 풀을 먹는 것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을 것을 준다는 것
말들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태초부터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던 일.

말을 본 아이들은 바람이 되어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20kg짜리 어린 아이가
500Kg짜리 말을 보고 말한다.

귀엽다.
귀여워?
네, 정말 귀여워요.

그건 그렇게
태초부터 약속이 되어 있던 일.

마지막 소식 - 가을의 무게

가을이 제일 쓸쓸하다카이.
왜요? 곡식이 익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제일 좋은 때 아닌가요?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도 나이를 먹으니 제일 쓸쓸한 게 가을이야. 이제 곧 단풍 들고 나면 세상이 텅 비듯 고요 안해지겠노. 자네가 언제 왔지?
지난 2월이요.
야아, 정말 세월은...
그때는 이 산골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숲이 꽉 찼네요.
꿈에 자꾸 먼저가신 고모가 보이는데, 나보고 이리로 오라캐.
에이, 그냥 꿈이 그렇겠지요.
그런가? 그냥 꿈인가?
당연하지요. 그분더러 이쪽으로 오라고 해보시지요? 하하하...
그것도 안 된다캐. 그럼 더 나쁘다꼬.

계절은 이 행성에 하나뿐이지만, 계절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모두 제각각. 이 가을의 무게. 희망과 두려움, 보람과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이 밤은 과연 현실일까? 일장춘몽일까? 내 이 가을은 먼 훗날의 내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어쩐지, 귀뚜라미 울음이 쏘듯이 가슴을 헤집는 그런 가을이다.

다음 가을, 그저 걱정의 무게라도 조금 덜어낸 가을이면 좋겠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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