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묻은 구두는 안 닦습니다

by 김명기 posted Jan 0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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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묻은 구두는 안 닦습니다.

“이런 흙 묻은 구두는 안 닦습니다. 가서 흙을 닦고 오세요.”

오늘 구두미화원에게 들은 이야기다. 나는 구두를 잘 안 닦는다. 새 구두를 사도 집에서 일 년에 한 두어 번 약칠을 하고는 그만이다. 화이트칼라의 삶을 포기한 뒤로, 신발을 미적인 표시를 내기 위해 신어야 할 일이 그만큼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방에서 마분을 치우기 위해서는 신발 코에 쇠가 들어가 있는 안전화를 신고, 승마를 지도할 때 운동장에서 신는 말 부츠는 하루만 신어도 모래에 진흙투성이가 된다. 나는 진정한 rural life를 살고 있다.

실은 겨울 승마부츠를 아우에게 선물 받았다. 안에 털이 들어있는 따스한 부츠다. 게다가 아우의 마음이 들어있는 부츠라서 나름 신경을 써 주고 싶었다. 집에서 대강 구두약을 칠하는 것 보다는, 구둣방에서 한번쯤 제대로 약을 입히고 광을 내서 오래도록 신을 요량으로 구둣방에 들른 것이다.

나 역시 사회생활의 균형 감각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예전에, 그러니까 상당히 형편이 괜찮을 때에도 이런 흙 묻은 구두를 닦곤 했다. 공장자동화 업무로 전국의 공사 현장을 다니다 보니 신사 구두에 흙 묻는 일은 예사였다. 공사장의 흙은 찰지고도 야물다.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이의를 듣지 못했다.

실은 지금이 그 당시보다는 좀 더 양호한 상태의 부츠를 신고 들어가 닦아 달라고 했다가, 이런 면박을 받은 것이다. 이해는 한다. 구두 닦는 이들도 흙먼지를 맡기는 싫을 것이다. 게다가 구두 미화원은 상당히 고소득의 직업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깨끗한 구두만 골라 닦는 구두 미화원이라니.

먼저 묵묵히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준 다음에,

“하지만 손님 이건 좀 지나치게 흙이 많이 묻었군요.”

라고 했다면 나는 오히려 그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내가 숲에서, 산에서 사는 동안 세상의 기준이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년 전에는 내게 상식이던 일들이, 이젠 몰상식이나 비상식으로 변해 버린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직업으로 구두를 닦는 사람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구두 닦는 일에 충실해야만 할 것이다. 우아한 부자인 구두닦이에게 깨끗한 구두만을 맡겨야 하는 소시민도 마음 편하지는 않겠지.

앞으로는 그 구두미화원에게 구두를 맡길 일은 없을 것 같다. 깨끗한 구두를 뭣 때문에 돈 주고 닦는단 말인가? 어쩐지 본말이 뒤집힌 것 같다. 나는 오늘도 또 하나를 배운다. 언젠가 내가 제법 돈이 많은 승마선생이 되었을 때,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태도 하나를 미리 배운 것이다. 그건 고마운 일이다.


Mars No. 16

www.allbaro.com

PS: 오늘 강남지역에서 교육을 하다가, 한 미화원에게 물었다.

“이런 구두도 되나요?”
“당연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1시간 후에 오실래요? 잘 닦아드릴게요.”

이 구두미화원이 바쁜 것은 당연하다. 일은 마음이 먼저다. 무슨 일이든 초심을 잃는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