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IIX-V (은행 강도)

by 김명기 posted Oct 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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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IIX-V (은행 강도)

첫 번째 소식 - 50년을 숨긴 비밀

어른에게 가까운 친구 분이 계신다. 두 분은 20 대부터 절친하게 지내신 모양이다. 한데 젊은 혈기에 기죽기 싫었던 어른은, 그 친구 분에게 같은 나이지만 자신이 생일이 조금 빠르다고 말씀을 하셨단다.

그렇게 평생을 지냈재. 그 친구도 가끔 히야히야(형아) 하면서 나를 잘 안따랬나? 근데 곤란하게 된기라.
뭐가요?
가가 칠순 잔치를 내보다 먼저 안했나? 그것도 일 년이나 먼저.
우하하,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도리있나? 가서 그랬재. 야아야, 알고보이께 니가 나보다 히야인갑다. 칠순을 우예 니가 먼저하노?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내 그랄 줄 알았다. 어째 좀...
아이구 그 후로 곤란하지 않으세요?
뭐가? 이젠 내가 지보러 히야라고 안해주나? 그래도 오십년 동안 히야 소리 들었으니까 됐재. 오십년을 같이 놀다 이제 노친 네가 다 되엤는데, 한 두 살 차이에 그게 우쨌단 말이고. 고마 되엤따마.

어른은 그렇게 말씀하시곤 빙그레 웃으신다. 50년 동안 숨겨온 비밀치고는 싱겁게 끝났지만, 누가 히야가 되었건 그간 두 분 어르신은 나름대로 신나고, 눈물 나고, 아름다운 청춘을 함께 하신 탓이겠지. 그 세월을 어찌하랴.

오늘 어른과 그 친구 분은 부부 동반해서 가을 제주도로 떠나셨다. 어른은 복이 많으시다. 아내에 평생 친구에. 아마 스스로 지으신 복 들일게다. 젊은 시절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시면서 말이다.

두 번째 소식 - 피뢰침

가을의 중심 속을 말달렸다. 베어 말리는 벼, 들깨를 털어낸 흔적. 가을은 이 행성의 생명들이 겨울의 바다를 건너도록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다. 먼 벌판의 끝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불이라도 난걸까? 혹시 하는 마음에 말에게 박차를 주고 달려가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농부가 수확이 끝난 작물들의 마른 줄기를 태우고 있었다. 순간 이건 낭비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쌀 이삭 몇 개, 참깨 몇 알. 수수 몇 줌을 위해 작물들은 몇 백배나 더 큰 덩치를 키워낸다. 그 알곡 몇 개를 남긴 뿌리와 줄기 잎사귀는 보람 없이 재가 되고 거름이 된다. 만약 신이 보다 영리한 존재였다면, 가느다란 줄기 하나에 커다란 알곡 몇 개로 훨씬 더 경제적인 작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똑똑한 인간들은 배추와 무를 결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넓은 들녘도 쌀 몇 가마니 생산하고 나면 모조리 거대한 짚단과 퇴비 뿐 아닌가?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인간의 판단이라는 생각도 순식간에 떠올랐다. 거대한 희생과 노력에 보잘 것 없는 결과일지라도 식물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했다. 초봄 추위를 이겨내고 죽을힘을 다해 떡잎을 흙 위로 밀어 올렸다. 한 여름 폭우 속, 격랑을 견디어 내며 살아남은 것이다. 왜? 바로 오늘의 수확을 위해. 저마다 만들어 낸 한 줌의 이삭을 모아 이제부터 긴 겨울을 견뎌내야 할 바로 우리를 위해.

천천히 말머리를 돌리며 나는 오늘 뜻하지 않게 얻은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자연은 올해도 최선을 다했다. 겉보기에 보잘 것 없는 수많은 것들이 죽을힘을 다해 만들어낸 곡식들을 먹고 우리는 또 한 해를 살아 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저마다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힘을 다한 작물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몇 몇 인간을 빼고 나면, 이 행성의 모든 존재들은 미안할 정도로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최근 재미난 농담을 만들었다.

너처럼 대강대강 사는 녀석에겐 선물을 해야 돼.
아유, 선물까지나? 뭘 주시려나?
피뢰침!

세 번째 소식 - 생활의 발견 (은행 강도)

그래가꼬 난리가 안나뿌맀나?
정말요? 야아! 대단한데요?
아침에 가서 200만원 털어가 뿌맀다캐.
먼 소리고? 사람 없는 마감 시간에 300만원 털었다 안카나?
아니, 그래도 은행인데 그게 전부였어요?
이런 산골에 돈이 어딨노? 먹고 죽을라캐도 읎재.
강도도 바보네요. 털라면 돈 많은 시내 지점을 털지.
그런데는 경비가 철저 안하나? 그라이 사람 없는 곳을 골랐겠재.
그래도 장난감 권총에 돈 털리는 바보가 어딨노?
우예 아는데? 만약 그기 진짜 권총이문 죽는데, 어느 바보가 뎀비?
그래도 그걸 확 달개 들어서...

어른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시만, 기억은 자꾸 엇갈린다. 어쨌든 진짜 은행 강도 이야기다.

이곳 팔공산 기성동엔 조그만 농협 지점이 하나있다. 그곳이 문을 닫으면 동명면이나 칠곡 읍내까지 가야만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평일에 들르면 객장 내엔 노인 한 두 분이 세금고지서를 들고 오가고, 한 눈에 보이는 공간에는 직원 몇 명이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서류를 넘기고 있다. 마치 시간이 정지 된 것 같이 한산한 곳이다.

그런데 늘 들르던 이곳에 권총강도라니. 느닷없이 스펙타클이다.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없다. 다른 곳, 다른 지점들의 이야기다. 에이 그럼 그렇지. 이렇게 조그만데 무슨 은행 강도?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목심을 좀 사며 슬며시 물어 보았다.

여기 강도든 적 있어요?
아니 그 야긴 왜 갑자기.
정말 있었어요?
맻 해 전에 있긴 있었지만도, 뭔 일입니꺼?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나 보다. 아주머니의 눈이 커졌다 가늘어지며, 나를 은행 강도 보듯 한다. 우왓! 정말 있었구나, 은행 강도 사건! 나는 이 농협의 조그만 공간을 살살 걸어 다니며 그 긴박했던 순간을 느껴보려 한다. 고적한 시골 은행의 강도.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이렇게 순박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놀랐을꼬?

산너머로 해 뜨고, 골짜기로 해지는 이 심심산골에도 가끔 얼토당토않은 사건이 일어나곤 한다. 세상은 그래서 짐작도 할 수 없이 흥미진진한 곳이다. 이젠 농협에 갈 때 조금 긴장하게 되겠지. 슬슬 주위도 둘러보고, 혹시 수상쩍은 젊은이들은 없나 살피며.

마음속으로 재미가 있건 말건, 여전히 노인 몇 분만 세금 고지서를 들고 오간다. 만약 은행 강도를 모의하는 범죄자가 있다면 이 글 읽고 여긴 절대로 오지마라. 털어봐야, 외상으로 산 권총 값도 갚기 힘들지 않을까? 아니면 용감한 칠순 노인네에게 두둘겨 맞던가.

네 번째 소식- P씨

P씨는 이제 65세다. 그는 지금 마방과 마분을 치우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일주일에 4일 씩, 주로 오전에 4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60만원을 받는다. 물론 우리의 철저한 정부에서는 원천징수를 3.3% 씩 뗀다. 어김없이 뗀다.

그는 대구의 상당히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제법 한가닥했던 추억을 지니고 있다. 군도 보안부대 출신이다. 그는 몇 개의 사업에 실패했고, 그래도 부잣집 자제의 남은 현명함으로 칠곡에 3층짜리 주택을 가지고 있다.

야야, 그 노인네 보통 아니더라. 내가 연습해 놓은 한문 공책에 한시를 줄줄이 써 놓았더래니까?

노인은 더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산다. 건물에서 나오는 세로 두 노인네 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지금도 이렇게 일을 한단다.

예전에는 주유소에서 일 안했읍니꺼? 한 달 동안 주유소에서 먹고 자고 해도 한 달에 70만원 받았지예. 지금은 일도 수월하고, 내 시간도 많아서 좋습니다. 이런 계곡에는 일부러 놀러도 안옵니꺼? 좋~습니더.

말씀을 그렇게 하셔도, 일을 부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편하지 만은 않다. 하지만, 워낙 일을 깔끔하고 부지런하게 해서 한 달 내내 잔소리 한 번 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 같은 일에는 정말 고맙기 짝이 없는 일꾼이시다.

그전에 젊은 대학생도 써보았다. 그는 젊다는 것 하나 이외엔, 전부 문외한 이었다. 진짜 세세하게 일을 시키지 않으면, 전부 새로 일을 해야 할만큼 사건(?)을 만들었다. 그가 돌아간 뒤에는 뒷정리를 따로 해야만 했었다. 돈 주고도 일 부리기가 이토록 힘들다면, 어떤 바보가 일부러 사람을 쓰려 할까?

나는 그 젊은이를 생각하면 P씨가 얼마나 적합하고, 근면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P씨에 대하여 감탄한 것은 P씨가 일을 하기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여전히 새로 쓴 사람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을 때, P씨가 돌아 간 뒤, 마방을 둘러보았다. P씨는 마분 수레까지 깔끔하게 씻어 놓은 후, 장갑을 마분 수레의 손잡이에 꽂아 만세를 만들어 놓았다.

이후 P씨의 작업 마무리는 늘 이렇게 만세로 끝나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서 P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가 정말로 선진국이 되어 가는 것을 느껴요. 15년 전쯤 유럽에 있을 때,  구미의 노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웬 노인들이 이렇게 일을 많이 하나? 하고 의문을 품었었는데, 알고 보면 그 노인 분들도 다 은퇴를 하고 다시 일을 하고 싶어서 나선 분들이었더라구요.

신문에는 노인들이 일자리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정말로 힘이 필요하거나(실제로 그런 일은 별로 없다. 기계가 있는데.) 전문직종이 아니라면, 노인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새로운 경쟁력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의 경험과 도덕성, 꾸준한 항상성. 그리고 연륜에서 오는 격과 자세. 이런 것은 젊은이에게는 절대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제대로 사업을 꾸려가고 싶은 중소기업, 소점포의 사장님들이라면 반드시 노인 인력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올바른 심성, 인간적인 정까지 갖춘 제대로 된 인력.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하다. 이미 세상을 겪은 노인들은 절대로 세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다섯 번째 소식 - 소녀 단풍

일부러 팔공산 길을 좀 돌아왔다. 막 물 들기 시작하는 단풍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10월 말에서 11월 말이면 완전하게 들것으로 보이는 팔공산의 단풍은 이미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화려함을 짐작하게 만든다.

누구의 기특한 솜씨인지는 모르지만, 양 쪽에 늘어선 단풍나무들이 수 Km나 이어져 있다.

다른 곳 단풍은, 단풍도 아이라카이. 제 철 되마,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카이. 전국에서 단풍 보러 여기로 안  오나. 사람이 사람에 떼밀려올라갔다, 밀려내려 온다.
저는 00산의 XX사가 참 좋던데요?
00산 XX사? 택도 없다.

어른의 큰소리는, 그저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는 애향심에서 나오는 말씀만은 아니다. 바삭바삭한 가을바람. 뽀드득 소리가 나게 맑은 대기. 차창을 열고 아직은 수줍은 소녀 단풍에 취해 한 참 길을 돌아오다, 숯가마에 들렀다. 하늘이 바다처럼 푸르고 깊은 오늘을, 제대로 된 술꾼이라면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땡땡 소리가 나는 참 숯에다, 삼겹살을 구워 술잔에 담긴 가을을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겠다.

오늘 팔공산 허리쯤에 자그마한 연기가 푸른 하늘로 솟아오를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 아래엔 가난한 시인이자 마부(馬夫)인 중년 사내가 앉아, 파닥파닥 숯불에 부채질을 하며 천천히 소주잔을 기울일 것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가까운 벗들을 좀 불러야겠다.
팔공산의 가을. 이 찬란한 가을 속에 혼자만 앉아 있는 것은 지나친 사치다.

마지막 소식 - 동물의 왕국.

저기 채마 밭 가장자리에 고양이가 한 쪽 발을 들고 꼼짝도 않고 서 있재. 한동안 그렇게 있다 밭에 흙이 달싹달싹하면 사정없이 내리 찍는기라. 발톱을 세워가꼬. 그라면 두더쥐가 여측없이 안  찍혀 나오나? 두더쥐는 밭에 작물 뿌리를 엉망으로 만든데이.
고양이가 효자네요.
여그서 쥐 본일 있나? 없재? 고양이가 없으면 여기저기 엉망이라카이. 고양이 때문에 쥐 걱정 안하고 사는기라.
아하, 그러네요.
전에 까치가 배랑 감을 마구 쪼아서 다 못쓰게 맹글었는데, 그 까치를 개가 안 잡았나?
개가 까치를 잡아요?
까치가 와서 개 사료도 슬슬 훔쳐 묵고, 개 줄이 닿는 그 사정거리 밖에서 개를 살살 약올린다카이. 캐도 개는 못본 채 한다. 조는 체 하고 있다가 까치가 개 줄이 닿는 곳 까지 오믄 사정없이 뎀벼서 까치를 잡재. 근데 신기한 것은 개가 까치가 있는 곳으로 달개 드는게 아니라, 까치가 날아오르는 곳을 짐작해서 허공으로 펄쩍 뛴다카이. 그라믄 까치가 개입으로 저절로 날아 들어가 잡히는기재. 희안하다카이.

하루는 개가 멧돼지 ㅅ ㅐ ㄱㄱㅣ를 잡고, 또 언젠가는, 그 어미가 개 옆구리에 이빨 자국을 낸다. 한 밤에 일을 마치고 오두막으로 돌아오자면, 마치 선글라스를 쓴 것 같은 너구리가 차안의 나와 눈을 마주치는 곳. 안광을 번쩍이는 고라니가 길 한 가운데서 다가오는 차를 바라보다, 차가 멈추어 서면 그때서야 펄쩍 달아나는 곳. 늦여름 밤이면 반딧불이들이 고성의 성벽을 어지러이 날아 다는 곳. 나는 팔공산 기슭, 여기 동물의 왕국에 산다.

현실로 보자면 척박한 삶의 귀양살이. 하지만 나는 점점 이 고적한 산골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어떤 삶에도 이야기와 아름다움은 숨겨져 있다는 것. 신의 배려는 시간 구석구석 숨겨져 있다.

그러니 살자. 열심히 살아만 있자. 내일이면 우리는 늘 새로운 행성에 서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떤 가슴 뛰게 멋진 광경을 보게 될지 모른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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