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IIX-III (신선의 행복)

by 김명기 posted Oct 0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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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IIX-III (신선의 행복)

첫 번째 소식 - 자랑.

몇 년 전의 일이다. 나는 개뿔도 없는 주제에, 주변의 분들을 꼬드겨서 가끔 노인 복지 시설로 봉사를 갔다. 그곳에는 기다림이 가득했다. 마지막에 대한 염려.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편안한 종말에 대한 기다림. 때로 사람에게는 그런 막막한 기다림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곳에라도 가서 온종일 마음을 쏟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가여운 삶도 있다.

그러니까, 여긴 아무나 못 들어와. 아들이라도 하나 있으면 절대로 못 온대니까?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몇 십년간 얼굴한 번 못 본 아들, 평생 돈 한 푼 안보태주는 아들이라도 그런 아들이 있다고 주민등록에만 있으면 절대로 안 돼. 정말로 아무 것도 없어야지만 들어 올 수 있어. 가난한 노인네들은 다들 여기 들어올라고 줄을 섰지. 우리 동리에서는 나만 들어왔어. 나는 정말로 아무도 없거든. 아무 것도 없어. 아들도 없고, 딸도 없고, 가족도 하나 없고.

이빨이 없는 입술을 호물거리며, 주름살 속에 파묻혀 계시던 할머니는 정말로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나 강조 하셨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고. 그래서 다행히 여기 들어 올 수 있었다고. 속 썩이는 아들 따위가 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이 가을, 갑자기 그 할머님이 입술을 오물거리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미 몇 개의 겨울이 흘렀다. 아직 살아계실까? 철없는 봉사 대원을 앞에 두고, 아무도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씀하고 계실까? 아들 따위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두 번째 소식 - 아름다운 기회

찾아가는승마교실의 첫 수업 이후, 승마계에서는 참 말들이 많았다. 격한 토론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승마를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라며 일부 승마인들은 흥분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는 이미 현실 속에서 승마 대중화를 위한 방법으로, 일 년 동안이나 실행하고 있는데, 상상도 못한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늘 승마를 그들만의 리그니, 귀족적인 스포츠니 하는 사람들의 토론은, 이 세상의 모든 쓸모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한 자들에게 선고되었던 것처럼, 부정적인 시각과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 건 안 돼. 승마는 승마장에서만 해야 돼. 그래서? 그 이후는?

나는 청량초, 정자초, 마장초 등 3개의 학교로 승마교실을 늘려가고 있고, 현재 몇 개의 초등학교에서도 검토 중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승마수업은, 시간이 갈수록 확대 되고 안정될 것이다. 아마 10년쯤 후에는 초등학교에서 승마 수업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신기한 이야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느 학교에서도 늘 보던 광경일테니까.

잘했고 못했고가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는 것. 이 행성이 팍팍한 삶에서, 말이라고 하는 멋진 생물체와 함께 삶을 누릴 시간을 주었다는 것. 내가 하는 일의 긍정적인 측면은 그 정도다.

[말] 미셀 트루니에 산문집 ‘예찬’ 中

오늘날 승마가 젊은 사람들 가운데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말과의 친화보다 더 교육적인 것은 없다. 말은 기계가 아니다. 말과는 서로 공감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말에 대한 사랑은 그 거대하고 따뜻하고 근육이 발달한, 그리고 땀 냄새와 똥 냄새가 구수한 몸뚱이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시작된다.

세 번째 소식 - 신선의 행복

한 잔 하시죠. 귀한 술인데.

평소 승마 대중화와 마필산업으로 인한 농촌 발전에 관한 의견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 주시던 분이 제주도 소주인 한라산을 주고 가셨다. 나는 어른께 고하고 등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폈다.

참나 그러니까, 그 때 내 밑에 있던 직원이 10년 만에 찾아와서 그러는 거라.

회장님 실망했습니다.
와?
지는 회장님이 이 대구 경북에서 뭔가 큰 자리를 하고 계실 줄 알았다 아닙니꺼?
그란데?
그란데, 여기 산골에서 꼭 시골 농부처럼 살고 계시니.
나는 실패 한 게 아이라,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기라. 자네는 아직 젊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라이까, 그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돌아갔재. 참 딱하다카이.

어른은 혀를 차며 지난 영광을 돌아보신다. 그러나 그 덧없음은 깊은 회한과 그리움을 지닌 다름 아닌 어른 자신의 과거다. 누구라도 자신의 과거는, 애달프고, 멋지고, 그립고, 행복했던 시절이다. 두 번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일회성의 순간. 찰나의 행복.

저녁 식탁을 앞에 두고 TV를 보다, 어른은 무릎을 탁! 치셨다. 바로 저거야. TV 에서는 지리산에 파묻혀 사는 한 노부부가 먼 산아래를 굽어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떤 늙은 부부가 옥황상제를 만난거야. 옥황상제는 그 부부에게 뭐든지 말해라 소원을 들어주마. 그 늙은 부부는 이렇게 말 한 거야. 그냥 우리 부부 죽을 때까지 작은 텃밭이나 가꾸며 마음 편히 살게 해달라고. 그러자 옥황상제는 버럭 화를 내시며 말했지. 그건 인간이 누릴 행복이 아니야. 욕심 많은 인간은 그런 여유로운 행복을 누리지 못해. 그건 신선이나 누릴 행복이지.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자? 신선이나 누릴 행복을 누리매. 텃밭 가꾸며 늙은 마누라와 상추 쑥갓에 막걸리나 마시며 산골에 살지.

나는 말없이 어른께 잔을 내 밀었다. 무슨 말씀이 더 필요할까?

네 번째 소식 - 미래와의 조우(遭遇).

오른 손이 시큰 거린다.

오늘 하루 종일 드릴로 나사못을 박은 탓이다. 일 년 가까이 마필 운송 트럭을 사용하다보니, 나사못으로 박은 간판이 흔들거린다. 나는 나사못 하나하나에 실리콘 액을 바르고,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폭을 맞추어 가며 나사못을 박는다. 진동이 심해도 이 나사못들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간판에 나사못을 다 박은 뒤에, 나는 말들이 내는 소음 방지를 위해, 트럭 바닥에 새로 깔은 고무판을 바라본다. 설비업체에 맡긴 일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바닥에 주저 않아 나사못을 박는다. 덜렁거리던 고무판은 조금씩 고집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이제 이 고무판은 말들의 균형과 시끄러운 소음을 잡아 줄 것이다.

잠시 마음에 들도록 일이 마무리 된 트럭 바닥을 바라본다. 곁에 무성한 대나무 숲에서 메마른 바람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전선을 꾸리다가 다시 말차 문짝을 바라본다. 용접을 해야겠다. 나는 용접기를 꺼내 접지를 한 뒤, 몇 군데 손을 본다. 잠깐 실수로 용접불꽃을 바라보았다. 잠시 세상이 하얗게 사라진다.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며 서툰 용접을 하다 보니, 허리가 뻐근하다.

아무래도 주말마다 하루 종일 서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이런 건 곤란하다. 승마는 허리에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승마 전문가로써 솔선수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승마가 아니라, 승마를 지도하다가 허리가 나빠졌다면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는 나이가 들고 있다. 내 육체는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살고 있지. 라고 나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제대로 나이를 먹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말없이 나를 바라만 보아도 서로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바라만 보며 서로 미소를 짓겠지.

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나는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다. 내가 늘 땀을 흘리며 일 할 것임을 안다. 오른 손이 아프면 왼손으로 일하겠지. 양 손이 다 아프면, 발을 써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겠지. 사지가 다 아파도, 어떻게든 붓 한 자루는 놀릴 수  있겠지. 그것이면 족하다. 나는 미련 없이 육체와 시간을 소모해야만, 우리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득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가을은 늘 마음이 먼저 고프다. 내일 오래 된 친구에게 전화나 할까? 잘 지내고 있겠지? 여전히 철없이.

다섯 번째 소식 - 화씨의 벽(和氏之璧)

2005년의 일이다. 그 당시 승마정책을 담당하던 정부의 담당사무관에게 그동안의 경험과 조사를 바탕으로 한 승마산업의 현황과 미래라는 자료를 제출했었다. 그 인연으로 새로운 승마정책에 관한 자료의 제출을 권유 받았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서 유관 기관에서 회의를 했다.

그 기관의 담당자는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나를 생활체육 승마인이라고 착각을 했는지, 말고삐도 못 매는 것들이 승마를 한답시고, 정식으로 배운 승마인이 아니면 형편없는 실력에, 성희롱 사건이나 일으키고... 그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게 무슨 점잖치 못한 말씀이십니까? 저를 언제 알았다고?

결국 그 담당자는 아이디어만 빼냈고 사업은 실패했다. 당시 내가 그 기관의 장을 만나서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그 담당자가 4년여 넘게 내 뒷 담화를 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간간히 안부처럼 듣고 있다.

2006년에 또 정부에서 연락이 왔다.

승마계에 연구를 좀 할 게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진국들의 산업현황도 연구하고, 우리나라의 실태도 전수조사를 해야지요. 엔듀어런스경기, 즉 지구력 경기도 빨리 개최해야 하구요.

당시의 정부 담당자는 얼마 후 다른 부서로 옮겼고, 2007년에 정부 담당자들끼리, 해외 출장을 잘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나는 L모씨, K모씨, O모씨, J모씨 까지 5년 동안 4명의 정부 담당관들을 찾아가서 열심히 승마산업의 발전 가능성과 방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모두 종무소식이었다. 웃기는 것은 그 때마다 제출 했던 자료들이, 현재 슬그머니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겐 아무런 소식도 없이. 그리고 나와 그 제출 자료들 간의 개연성이 거론 될 때마다, 나는 상당히 욕을 먹었다. 나는 가만히만 있어도 욕을 하는 이 정부를 포기했다.

2M.B.께서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엔, 내가 제출한 ‘승마산업을 통한 농촌경제 활성화 방안’ 이 당당히 100대 공약에 들었다. 100대 공약을 담은 두툼한 책도 출간되었고, 당시 선거 대책위원장이시던 P모 의원과 녹색 모자를 쓰고 사진도 찍었다.

아, 이제는 뭔가 달라지나보다. 그러나 그뿐, 당시 100대 공약을 주관하던 조직마저 사라졌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틀림없이 한두 해 뒤에는 내가 제출한 정책이 버젓이 시행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부가 그래왔던 것처럼. 내게 고위 공무원들이란, 남의 아이디어만 빨아들이는 사람이다.

작년에 이어, 며칠 전 강기갑의원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국내 생활승마의 현황, 승마장 운영의 상태 등에 관한 요지로 국회 증언을 해 줄 수 있느냐고. 글쎄, 해도 될까? 승마산업의 대중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오래전부터 내겐 화씨의 벽(和氏之璧)이 되었다.

어제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명의의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이미 독백한 바와 같이, 정부기관 따위는 이미 포기 한지 오래다. 정부기관에서 평범한 백성의 아이디어 같은 것을 도와줄 리가 없지. 나는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나는 그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말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기가 빨라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바램이고, 그때까지 열심히 욕만 먹으면 될 일이다. 괜찮다.

마지막 소식 - 고개 숙이기.

오두막 앞마당의 감나무 가지는 이제 완전히 휘어졌다. 감나무 아래를 지나노라면 나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된다. 대추나무도, 호두나무도, 밤나무도 한 해의 보람을 안고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 어린 시절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들었던 그 격언은, 10월의 들판에만 나가면 절로 떠올리게 된다. 가을은, 점잖고 천천히 친절한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고개 숙인 사물의 우아한 세계다.

팔공산의 옅은 고동색 가을 길. 뒷짐을 지고 고개 숙인 한 중년사내가, 휘적휘적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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