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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묵은 놈들이 좋아

by 항아리 posted Feb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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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이란 것은 환자라는 원자재를 이용해 이윤을 발생시키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하나의 시스템 체제와 같다.
거기서 의사는 그 시스템에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대로 충실히
움직여야 하는 로봇과 다를 게 없다.

각종 검사는 너무나도 뻔한 순서로 진행되며,
그 검사에서 뽑아지는 데이터로 적용하는 방법 또한 천편일률처럼
정해져 있다.
사람은 제각각 다르나,
그 사람이 환자가 되면, 똑 같은 원자재로 취급되어 똑 같은 방법에
적용된다.

환자라는 원자재는 현대의학 시스템 안에서 가급적 오래 버텨주고,
오래 소용될수록 좋다.
가장 이상적인 환자는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없이 오래도록 정체상태를
지속하거나, 눈꼽만큼씩 나빠지면서 오래오래 버텨주고 견뎌주는 내구성
높은 환자다.
그런 환자는 흔치 않으므로,
현대의학 시스템은 대개의 환자를 그런 환자로 만들어간다.

금식과 다양한 검사의 반복은 필수 코스이고,
주사와 각종 주사재, 약물은 필수 아이템이며.
수술은 전가戰家의 보도寶刀와 같은 강력한 도구이다.

환자라는 원자재가 소용이 다하면, 친절하게 장례까지 치러준다.
주차장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라면,
장례식장을 구비하는 것이야말로 이윤과 부가가치 창출이 최대의 목적인
현대의학의 화룡정점이자 백미라 할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학엔 보험이란 강력한 동맹군이 존재한다.
환자들은 보험이란 장치에 매료되어 기꺼이 현대의학의 볼모가 된다.
뻔히 지급될 보험료를 받지 못하는 게 아깝다는 것이나,
정작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챙기듯,
그 보험료는 현대의학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며,
환자는 잘해야 본전치기다.

현대의학 뿐인가.
금융만능, 자본독재의 시대에 성가와 개가를 올리며 작동하고 있는 모든
시스템이 그와 같다.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로봇들은 더 이상 오만하거나 건방을 떨지
않으며, 오히려 겸손하고 인간적인 탈을 쓰고 있다.

저희에겐 언제나 고객님의 행복이 최우선이랍다.
저희는 언제나 고객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이보다 더 추하고 역겨울 수 있을까.
추함과 역겨움은 반드시 달콤하고 아름다운 언행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겪어봐야 알고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는 3차원의 동물이다.
3차원은 오감의 인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체험과 경험의 장이다.
오감은, 겪어보기 전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다.
대개 육감이라고 잘난 체 하는 그 어떤 것도 오감을 통한 사전정보 없이는
무의미하다.
겪어봐야 안다는 것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있고, 삶의 까닭이 있다.

인간은 우주를 관통하고 만물에 두루 작용하는 어떤 완벽한 질서-보통
신이라고 하는 그것과 연결되는 13차원까지 갖춘, 13차원의 다차원 동물이나,
삶은 반드시 3차원의 시공간을 통해 수행하게끔 되어 있다.

영성을 추구한다는 자들은 차원상승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지만,
인간은 이미 13차원을 갖추고 있다.

4차원 이상은 오감과 육감의 인지와 인식 너머에 있어
육신을 갖고 3차원 체험의 장을 사는 동안엔 알 수 없는 일이고 굳이 알려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서 인간은 이미 3차원에 태어나고 3차원을 사는 목적과
까닭을 스스로 결정해 놓았고, 그 방향까지 잡아놓고 있다.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결정했듯,
죽는 것 또한 이미 스스로 결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창조한 매순간의 체험들은 소중하고 중요하고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그 중에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란 인연을 통해 전해져오는 여러 체험들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없다.

현대의학에 제 발로 투신했다가 제 발로 거부하고 뛰쳐나온 체험은 새삼
반복할 필요가 없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선택과 체험은 있을 수 없으나,
그것을 재탕삼탕 반복한다면 멍청하고 어리석다 해도 억울해할 일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스스로 선택했고 스스로 결정했으며 스스로 창조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인연을 통해 기다렸다는 듯이 체험들이 다가온다.

현대의학에서 가장 반겨마지 않는, 그래서 현대의학이 기뻐 난치병, 내지는
불치병이라 명명하고 오래오래 진물과 단물을 빨아먹을 계획을 진작 널리
공표한 그런 질병을 스스로 극복해낸 인연들이 준비된 것처럼 다가와,
체험을 나눠주고 공유하는 것은,
3차원 삶의 경탄스러움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 하다.

물론 그들의 체험이 항상 선택받은 것은 아니고,
그들의 체험을 버리고 다시 현대의학을 선택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망가져서 다시 살려달라고 달라붙어 이를 데 없는 피로감을 주는
사람들도 상당하다고 하지만,
그런 인연을 스스로 오게끔 창조했다고 보는 사람의 경우는
그만큼 소중하고 감사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저쪽 구석에 내버려 두고,
오로지 매순간의 인연과 체험을 실행하고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3차원의 삶을 사는 인간에겐 가장 당연하고 합당하며, 충실한 모양이다.

새로이 선택한 방법들은 누구나 아 그거, 할만한 예로부터 잘 알려져 온 것들에 있다.
21세기에 살고 있다 한들 앞뒷집양옆집의 누구나 어디 한 두번 살아본 인생들인가.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한,
존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이미 갖춰져 있고 준비되어 있다.
인간들 스스로, 바로 자기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갖춰놓고 준비해 둔 것들이다.
오래된 것일수록 훌륭하고 소중한 게 당연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다만, 같은 방법과 같은 체험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실행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똑 같은 방법이라도 어떤 작용과 효과를 낼 지는
언제나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3차원을 사는 동안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에 관계없이 똑 같이 적용하여,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똑같은 상태로
만드는 방법과,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하며, 그 사람이 결과를 스스로 내게 유도하는 방법은
선택의 문제이나,
어느 쪽이 사람이 체험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굳이 분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