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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가 시어서 안 먹는 건 아니지요

by 윤영진 posted Mar 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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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245싱글파워를 한 대 만들고
자작게시판에, “출력관의 귀천 없음”을
소재로 글을 하나 올린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는 항상 소출력 직열관에 대한 애호심이 큽니다.

그러나 반면 6V6으로 대표되는
저렴하고 음질 좋은 방열관에 대해서도
좋은 평을 한 바 있습니다.

저렴하고 소박한 관도 좋은 트랜스포머와 좋은 부품으로
정성껏 제작하면 훌륭한 음으로 보답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이런 논의가 본의 아니게  
조금 핀트가 어긋나거나 조금 도를 지나쳐서
진행되는 경우도 자주 봅니다.

마치 6V6이 대표적인 천하의 명 출력관인 듯,

오디오 경륜이 극에 도달하면 6V6 싱글앰프로
귀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인 듯,

6V6 싱글 정도에서 벗어나
고가의 유럽제 직열관 앰프를 쓰는 것은
소리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허영심에 의한 것인 듯…

이러저러한 논의가 너무 당연스럽게 이루지기도 합니다.

그건 아니지요.


폭스바겐 소형승용차의 좋은 품질과 적당한 가격,
내구성과 연비, 드라이브 능력 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평가는 어디까지나,
“저렴한 그레이드 중에서”라는 전제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아무리 폭스바겐 소형차가 좋다고 해도
그건 그만한 그레이드를 기준해서 그럴 뿐입니다.

벤츠나 벤트리, 롤스로이스 등의 럭셔리 클래스
고급차들과 절대비교는 할 수 없지요.


진공관(출력관)도 마찬가지입니다.

6V6, 6L6, EL34… 등의 빔 출력관들이
출력도 쉽게 높이 뽑을 수 있고
방렬관 중에서도 특히 직진성이 좋고
발진 우려도 낮은 등
여러 가지 장점을 골고루 갖춘
아주 좋은 출력관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들이 지금껏 인류가 만들었던 진공관 중에서
최고의 절대적 품질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지요.

“출력”은 예외로 놓고 냉정하게 비교하자면
같은 비용으로 증폭기를 만들어서
방열관이 직열관보다 최종 음질이 우월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엄청나게 훌륭한 제작기술을 가진 분이
좋은 부품으로 방열관 앰프를 잘 만들어서
직열관 앰프 허접한 것보다 훨씬 좋은 음을 냈다는 식의
아주 “예외적인 예”를 드는 것은 적합하지 않지요.)


하모닉 특성이나 직진성(방열관은 NFB없이 직진성 확보하기 어렵지요)
등 청감상 음질을 좌우하는 요소에서
당연히 직열관이 방열관보다 더 우수합니다.

문제는 좋다는 고전 직열관들은 워낙 값이 오를 데로 올랐고
구하기도 힘들고, 출력도 상대적으로 낮고,
회로 구성이나 드라이브도 상대적으로 까다롭고…

즉, 음질과 관계가 적은 일반적 조건들에서
직열관은 범용의 방열관들보다 안 좋은
조건을 많이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종합적인 조건들을
두루 합쳐서 고려해 보면,

꼭 많은 돈을 지출해서까지
고전 직열관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논의나 권고를 하는 것은
충분히 의의가 있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배경적 이해나 공감이 없이,

모든 진공관은 소리가 다 같아서
만들기 나름이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직결해 버리거나,

방열관이나 직열관의 음질 차이는 없다거나,

직열관 애호는 음감도 모르는 사람의 허영심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화해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빈티지 오디오 경력 한 20년 된 사람치고
희귀 고전 직열관이 음질이 안 좋아서 안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 비싸서 안 쓰거나 못쓰는 것이지…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못 먹는 것이지
포도가 너무 시어서 안 먹는 것은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