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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풀레인지

by 윤영진 posted Nov 1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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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전까지 몇 년 동안 풀레인지에 흠뻑 빠져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유닛도 유명하고 비싼 것부터 허접한 것까지 10여 조 갖고 있었고....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시들해지고 어느새 잊혀져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풀레인지의 한계를 체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서브 스피커로서의 역할 이상은 아니라는 식의 약간은 건방진 인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많은 유닛들이 집을 떠났습니다. 팔리기도 하고 그냥 남에게 주기도 하고...
주로 먼저 집을 떠나는 것들은 판매가 쉬운 유명 유닛이거나 그냥 남에게 주어도 서로 부담이 없는 것들이었으니, 요즘 남은 것들은 그저그런 중하급 유닛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요즘 밤에 마눌님의 시끄럽다는 성화에 "야간용"으로 그 중 가장 허름한 것 하나를
주로 밤에 들었습니다. 20리터도 안되는 정방형 밀폐 인클로져에 5인치 페라이트 유닛이 박힌,
암펙스 콘솔에 붙었던 진짜 허름한 것입니다. 내다 팔면 2만원도 못 받을....

처음에는 고역만 빽빽거리고 신경을 거슬렸습니다.
그런데 안에 솜을 채우고, 콘지에 대머를 칠하는 등 조금씩 튜닝을 해 가면서,
그리고 오래 안 움직이던 에지가 풀리면서 괄목상대할 정도로 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요 맹랑한 것이 음량을 좀 높이면 희미하지만 킥드럼 소리도 살살 내주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밤에만 들을 요량으로 했던 것이 낮에도 듣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가 이보다 훨씬 훌륭했던 풀레인지 유닛들을 과거에 한순간에 손에서 놓게 되었는지 반추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풀레인지의 본질적인 장점만을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러다가 점점 "풀레인지의 한계를 넘어보자"라는 식의 지나친 욕심이 싹튼 것입니다.
저역도 확 끌어내리고, 고역도 한계치까지 내고, 락이나 오케스트라 투티도 낼 수 있는 수퍼풀레인지로 진화시키자는 식의 터무니 없는 욕심이었습니다.

얼굴 예쁘고, 집안에 돈 많고, 학벌 좋고, 요리도 잘하고, 순종적인 마누라감을 찾는 식의 터무니 없는 욕심입니다.

인클로져를 갖고 별 짓을 다해보고, 유닛도 여러개를 병렬로 사용해 보고, 유사 멀티웨이도 해보고....
그러다가 "역시 풀레인지로는 안 돼!"라고 아주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곤 캐비넷에 쳐박아
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 나름의 장점과 모양과 특성이 따로 있습니다.
티코 같은 경차로 무거운 화물을 나를 수도 없고, 트럭을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대개 제 기준으로 전체 듣는 음악 중에서 두드려 패는 락이나 오케스트라 투티를 듣는 빈도는
1-2%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쩌다 앰프나 스피커 새 식구가 들어오거나 제작과정에서 튜닝을 하면서 기기 성능 실험을 하느라 대편성의 음악을 틀어보기는 하지만, 이건 음악 감상이 아니라
음향실험일 뿐입니다.

즉, 음향실험을 하는데는 대출력의 앰프와 전대역을 충실히 재현하는 대형 스피커가 필요하지만, 실제로 내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음악 감상을 하는데는 거의 "성능 과잉"의 수준들입니다.

전국의 어느 도로도 시속 120Km 이상을 내지 못하게 되어 있는 나라에서, 시곡 350Km 이상을 달리는 페라리나 람볼기니 같은 수퍼카를 사서 거기에 오버튜닝을 해 보겠다고 하는 욕심과도 비슷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풀레인지에 대한 제 왜곡되었던 생각도 정리되고,
시행착오에 대한 것도 나름 판단이 섭니다.

1. 풀레인지에서 너무 저역을 욕심내면 안된다.

  풀레인지의 가장 큰 매력은 맑고 섬세하고 예민한 재생력입니다. 네트워크가 개입되지 않고,
유닛 간의 위상 문제가 없이 고효율 유닛에서 재생되는 투명한 음이 가장 큰 자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욕심을 내서 저역을 확대하자고 하면 금방 부작용이 생깁니다.
  저역을 늘리는 기본적인 두 가지 길은 콘지의 크기를 늘리는 것과 인클로져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백로딩 인클로져 등을 통해서 부풀린 저역은 웬지 개구리나 복어가 상대방을 위협하려고 자신의 배에 공기를 집어넣어 부풀린 배처럼 느껴집니다.
  측정기로 측정하면 상당히 낮은 저역까지 풀랫하게 확대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에서는 역시 풀레인지의 장점이 많이 상쇄된 것을 느낄 것입니다.

  풀레인지의 인클로져는 역시 '평판'이 제일 좋고 다음에는 '밀폐형'이 차선입니다. 나머지 형태의 인클로져는 본질적인 장점을 희생시킵니다.

  풀레인지 유닛으로 재생대역을 확보할 때는 플랫하게 70-80Hz 정도를 내고 그 이하는 자연스럽게 감쇄하는 정도에서 멈춰야 합니다. 재미있게도 유닛의 특성상 이 정도 저역에서 타협을 하면 자연스럽게 고역은 18,000Hz 정도가 나오게 됩니다.

  * 첨부자료는 평판과 저역 리스폰스의 상관관계 도표입니다.

2. 풀레인지에는 적당한 앰프를 쓰면 안된다.

  마치 주문처럼 외워지는 말 중의 하나가 "풀레인지에 6BQ5(6V6)싱글 앰프...."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대로 6BQ5싱글앰프나 6V6 싱글앰프를 폄훼하고자 든 예는 아닙니다. 단지 위의 말에는
풀레인지에는 값싸고 허름한 앰프를 물려서 소박하게 들어도 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질 좋은 풀레인지는 멀티웨이 스피커에 비해서 매우 섬세하고 예민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앰프의 음질과 특성을 훨씬 더 명확히 드러낸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앰프를 적당히 쓰면 그 적당한 앰프가 멀티웨이 스피커에 물렸을 때보다 더 최종적인 음질에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허접한 풀레인지에 아주 잘 만들어진 앰프를 물린 소리가 더 좋습니다.

  만약 풀레인지 유닛을 50만원짜리를 쓴다면 앰프에는 300-500만원쯤 투자해야 좋은 소리를 듣습니다.

3. 풀레인지를 음향 실험용으로 사용하면 안된다.

  오디오 매니아들 누구나 "음향실험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애호가에게 음악을 들려주면서도 "이 음악 어때요?"라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소리 어때요?"라고 묻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도 아니고, 그런 음악을 계속 들을 것도 아니면서 가끔 "오디오 기기 검청용 테스트 CD' 같은 것을 틀어서 방구들과 문틀을 흔들어 보아야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풀레인지 유닛으로 이런 강박관념에 빠져 음향실험을 하면 합격할 리 없습니다.
  방구들이 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방구들이 울리지 않은 기억은 조용한 실내악 소품을 들으면서도 음악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아! 나는 지금 저역도 제대로 못 내는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있구나! 어쩐지 지금 듣는 바이얼린 소리에 무게감이 없더니...."

  하는 식의 자기 의심과 불안 신경증에 빠집니다.
  바이얼린 소리에서 무슨 방구들 무너지는 저음이 필요할까요?

4. 너무 비싼 유닛을 사용하면 안된다.

  독일계 빈티지 중에서 클랑필름 405니 하는 몇 가지 유닛은 수백만원을 호가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14인치에 달하는 대형 콘지를 사용하는 유닛은 역시 대역밸런스가 무너져 저역으로 치우여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달랑 하나로 사용되지 못하고 중저역 우퍼로 사용됩니다.(원래 풀레인지로 설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

  근래에 만들어진 풀레인지 유닛으로 가장 우수하다는 FS 유닛은 페어로 약 350만원쯤 합니다.
효율도 97db/W를 넘고 소형임에도 FO가 30Hz 근처까지 내려가는 울트라수퍼 유닛입니다. 한번 소리를 들어보면 350만원을 지불할 위험에 빠집니다.

  JORDAN의 JX92S 같은 소형 풀레인지는 겨우 4인치 정도의 소형이지만 백로딩 인클로져에서 거의 20Hz 근처까지 저역을 확장시킵니다. 문제는 효율이 낮아서 고출력 앰프를 필요로 하는 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너무 고가의 풀레인지를 사용하면 꼭 '心魔'가 끼어듭니다.
  비슷한 가격의 멀티웨이 스피커가 가진 광대역 특성, 특히 방구들 무너뜨리는 저역 같은 말도 안되는 성능을 더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비슷하게 돈을 들였는데 너는 왜 안돼?"

  라는 이상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마치 자식들에게 비싼 과외 시켰는데 너는 이웃집 아이보다 공부를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풀레인지는 "넘치는 풍족함"을 찾는 유닛이 아니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찾는 유닛입니다.

  유닛 페어 가격이 50만원을 넘는 것은 과투자로 보입니다. 그 이상의 돈을 지불하면 사람들은 자꾸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데, 그보다 낮은 가격을 지불하면 반대로,
  "야- 가격에 비해 훨씬 좋은 소리를 내는구나!"라고 기특하게 여깁니다.

5. 풀레인지에만 맞는 음악은 없다.

  풀레인지는 소편성 실내악, 성악곡, 라이트 뮤직, 가벼운 스탠다드 재즈 등등 듣기 적합하다는 곡의 성격이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관념화 입니다.

  저희 중고등학교때 야전(야외전축)이나 휴대용 카세트라디오 틀어놓고 고고장 분위기 내면서 춤추고 놀 때, 출력이나 저역이 부족해서 CCR 음악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야전이나 카세트라디오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풀레인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은 훨씬 대역도 넓고 다이내믹스도 높습니다.

  그냥 풀레인지로 하드락이나 대편성 오케스트라도 틀면 됩니다.
  단, 자주 대형 스피커로 '음향실험'하는 것은 참아야 합니다.
  사람의 귀란 기억력이 인체기관 중 가장 둔해서, 일정한 스피커를 계속 들으면 거기서 나오는 대역 밸런스를 자동적으로 균형있게 인식하게 됩니다.

* 역시 오디오란 사람 수만큼의 다른 의견과 인식이 있기 때문에 제 얘기도 그냥 그 중 하나의 다른 얘기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