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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DAC

by 항아리 posted Dec 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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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소리는 생명력이 거세된 죽은 소리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결론을 서슴없이 말할 줄 알아야 전문가 같은 겁니다.)

 

 소리의 본질은 생명이 깃든 에너지입니다.
 본연의 생명력을 가진 본래의 소리는 녹음단계에서부터 생명력을 상실하기 시작합니다.
 녹음된 걸 저장하면서 조금 더 상실합니다.
 그리고 그 저장된 걸 듣기 위한 소리로 되살리면서
 죽어가는 놈을 살리느냐, 화끈하게 더 숨통을 끊어버리고 죽은 소리를 즐기느냐로 갈리게 됩니다.

 

 디지털 소리가 완전히 사망한 소리로 좀비처럼 돌아다니게 된 건
 아마도 듣기 위한 소리로 되살리는 과정에 심각한 착오가 있는 까닭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녹음과 저장 단계는 그 분야의 종사자가 아니고선 관여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한 소리로 되살리는 과정부터는 다행히 어떻게 좀 해 볼 수는 있습니다.

 

 DAC에 집중 내지는 집착하게 된 것은
 과연 디지털 소스가 데이터화한 디지털 신호로 바뀌는 녹음과 저장단계에서부터
생명력이 거세된 것이 아니라면,
 LP와 같은 아날로그 소스를 다시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LP가 내내 유혹인 것은 거기 담긴 소리의 파형에 이미 생명과 호흡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망할 LP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LP의 세계는 너무 깊고 방대하며, 그 드넓은 세계를 헤엄칠 여력이 없고 능력도 안됩니다. 무엇보다
거기서 어중간하게 개헤엄을 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포기하는 게 편안함을 보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LP가 제겐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DAC를 더욱 가열차게 파 보는 것입니다.

 

 사진의 기판은 디지털 계통에서, 본인의 말을 빌자면, 18년 동안 자작을 해오신 이준환님의 기판입니다.
 제가 참 여러번 해먹었습니다.
 제 잘못은 아닙니다. 스치기만 해도 사망하는 허약한 디지털 칩들 때문입니다.
 그놈들이 설마 그 정도로 약해 빠진 놈들인지 몰랐습니다.
 마지막에 기판의 내부 회로가 망가진 것 또한 전적으로 제 잘못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강합니다.
 보기 싫은 콘덴서들 바꾼다고 기판을 조심성없이 쑤시고 헤집긴 했지만,
 기판이란 것 또한 그토록 약한 것이며,
더구나 층층이 다른 회로가 있는 복층의 매트릭스 같은 놈인지 새까맣게 몰랐습니다.
 디지털은 왜 그리 허약하고 복잡한 것이란 말입니까.

 

 기판을 새로 주문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수고를 대신 해주신 이준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결국엔 제가 바꾸려던 콘덴서들을 수거해 직접 붙여주셨습니다.
 다시는 기판은 건드리지 말라고 해드리는 겁니다, 라고 사뭇 위협적인 어투와 함께.

 
 저는 디지털 쪽은 모릅니다. 좀 망가뜨려 보니까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날로그부에 집중투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LP를 포기한 까닭의 저변에 도사린 자포자기와
 디지털에 무지하고 무식한, 그래서 무모하고 용감했던 쪽팔린 경험들을 녹여서
 DAC의 아날로그부에 제법 최선을 다했습니다.
 울분과 분노를 갈무리한 채....

 

 이상하게 정이 가는 DCA칩인 PCM1704의 변환된 아날로그 신호를 트랜스로 받아 진공관으로 넘겨줍니다.
 진공관에는 아웃트랜스가 붙어서 그 놈을 동작시키고 신호를 출력합니다.
 입출력 트랜스에 진공관 1단증폭의 간단한 구성이지만, 그만큼 트랜스의 능력과 진공관의 적절한 동작이
중요해집니다.

 

 이제 디지털 신호 자체에 생명력이 거세된 건 아닌 걸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아날로그 소스든 디지털 소스든 적어도 오디오 쪽에선 듣기 위한 소리신호로 되살리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며,
 그 과정에서 본연의 생명력을 얼마나 깨우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제아무리 상태 좋은 초반 LP를 훌륭한 턴테이블과 귀한 카드리지로 돌린다 한들 이큐가 티알방식이면

LP는 진작 공룡처럼 완전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DAC의 아날로그부 증폭소자가 티알이 아닌 진공관이 주류였다면 CD가 때때로 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 귀엔 진공관은 소리가 아무리 아니어도 그 속에서 살아있는 소리의 느낌을 느낄 수 있으며

티알은 아무리 밸런스가 잘 맞아떨어져도 정형화된 틀에 갇힌 죽은 소리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아닐로그 소스와 디지털 소스의 차이와 궤를 같이 하며

 아날로그 소스 시대엔 증폭소자가 진공관이 주류였으며

 디지털 소스 시대엔 증폭소자가 티알이 주류여서

 대개의 포노이큐는 진공관방식이며 대개의 DAC는 아날로그 증폭부가 티알방식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정도 문제라면 오디오쟁이라면 분명히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껍데기는 어쩌다 남은 케이스를 이용하였고 거기에 기판과 부품들을 강제로 끼워맞췄습니다. 제가 쓰는 것들의

외모의 공통점은 '흉측함'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고 목표는 더더욱 아닙니다.)

 (흰 뱃대지를 가진 트랜스는 15-0-15V, 와 0-9V의 디지털기판용 전원트랜스인데 정선의 트랜스장인께서

손으로 직접 권선을 감아 협찬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제가 미제 전원트랜스 코어를 끼워 넣었습니다.  당연히 소리 때문에.)

(입출력 트랜스 사이에 부끄럽게 숨어있는 애기고추 같은 놈은 6AU6 진공관이며 당연히 5결접속입니다. 뭣만한 놈이지만

뭣만한 놈들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