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일을 어찌 하면 좋단 말입니까?

by 김한봉 posted Feb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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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열리고
어디 아침을 알리러 오는 초인이 있다기에
오늘도 밤 잠 설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 할 준비에 쓰디쓴 쇠주 한 잔에 나를 녹이며
그래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헛소리를 되뇌이며 나를 담아 보낸다

단군이 하늘 길을 열었는지 말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기냥 열었다고 치고
대대로 반복되는 풍파에 시달리며 건국이래로 많은 이들이 여러 이유로
어즈러운 세상을 사연 많게 살다 갔다

엊그제 예전의 직장 동료를 오랜만에 전화로 인사를 나눴다
88년에 입사를 한 회사이니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였다
항시 신세를 안고 지내는 삶이다보니 이 분에게도 신세의 한자락이 묻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정말 고마왔던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다녔던 서울의 마포에 있는 학교는 좀 색다른 수업의 일정으로  
석사 과정 3학기 마치고 논문 학기를 진입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시험이 두 번 있었다
뭐 시험이라고까지 할 사항은 아닌데
그 고개를 넘기가 만만치 않았던 게 사실이라 기냥 우리끼리 편하게 시험이라고 했다
그래야 넘들에게 좀 공부하고 있다는 인상도 심어줄 수 있고 나름 있어 보이니까...
그러나 그 시험은 우리가 편하게 부르는 것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왜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치러야만 하는 외국어 시험이 있고
논문 발표를 위한 전 과정의 하나로 필수적으로 개인전도 한 번씩 해야 했다
부끄럽지만 이 두 과정 중 하나만 못 넘어도 졸업이 보류 됐다
사실 이 과정을 넘기 위해 다들 학원도 다니고 몇 년을 대기하며 보내기도 한다
입학 할 때 치룬 외국어 시험이지만 졸업할 때도 또 치룬다
졸업시험이다보니 강도가 다소 쎄다고 들었다
으례 서너번은 거친다고들 했다
지나고 나서 느낀 기분이지만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좀 있다는 것들이 나누는 한담이라고 자위했다
그런 것을 운 좋게도 나는 한 번에 넘었다
사실 내 실력이라고까지야 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합격이란다
중딩시절 어눌한 발음으로 몇 곡을 내리 불러 제낀 팝송 실력이 전부인 내가...
서슬퍼런 사정관의 잘못 된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으쨌거나 통과된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 동기들이나 선 후배가 축하를 해 줬지만 떨어진 다른 분들의 심기를 헤아려
펄펄 뛰어도 시원찮을 일을 기냥 달밤에 쇠주 한 잔 기울이며 실기실 어두컴컴한 한 켠에서 혼자 달랬다
그때 애인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미 18... 혼자서 무신 궁상이었는지...

사실 미대이다보니 시쳇말로 쭉쭉 빵빵 정도를 넘어서는 애들이 넘쳐났다
오죽하면 공대나 다른 과정의 학생들이 우리 전공과와 관련도 없는데 선택 강의 신청을 많이 했겠나...
신발 놈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으띃게든 예쁜 애들과 한 번 엮어 볼랴고...
강의 때 과제물이나 점심, 방과 후 술, 나이트 뭐 이따위 것들은 아예 걔네들이 전부...
그러니 얼굴이 되는 애들은 남자고 여자고 서로 인생을 즐기기에 바빴다
얼굴이 되길 해, 돈이 있길 해, 몸매가 되길 해...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는 항시 외로웠지만 혼자이니 그 시간에 뭐든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가슴 뛰는 추억 중 하나는,
처음 대학원이라고 입학을 하고 보니 모든 게 달랐고 3학기 선 후배가 모두 한 교실에서 같이 수업을 했다
한 학기 인원이라야 몇 안되니 전부 합쳐도 손가락 꼽을 정도...
1학기에 너무도 헤메며 작품을 하다보니 나만의 맥이 없었다
학부 때와는 다르게 모든 게 프로의 경지로 들어가야 했고 무엇보다 내 작품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이렇다하게 어느 한 분에게 매달려 전수받아 본 경험도 없던 터라 나는 더욱 애를 먹었었다
집에 절대로 손을 벌리지 말자 하던 내 결심 덕에 나는 항시 바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학업에 지장없는 선에서 뭐든 했다
공모전 할랴, 아르바이트 할랴, 한 눈 팔랴, 돈 있는 애들 부러워 할랴, 잘 노는 애들 쳐다 볼랴 하여간...
나만의 개성 표출에 올인하며 모든 걸 걸었다
어느 날인가 내가 봐도 흡족한 작품이 하나 나왔다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었다 싶어, 그날 나는 하루종일 뛰는 가슴을 안고 이리저리 방황을 했다
그때도 애인이 없어서 혼자 방황했다... 지미18...
다음날 아침 실기실로 향하는데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과제물 검사를 한다기에 다들 난리가 났다
그래도 나는 자신있게 내놓을 거라도 있었기에 의기양양하게 검사 준비를 했다
드디어 교수님이 들어왔고 뛰는 마음을 억누르며 칭찬들을 상황을 머릿 속에 상상하며 들떠 서 있는데...
내 차례가 되어 기분 좋게 미소지며 교수님을 바라 보는데...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 말없이 기냥 지나치셨던 분이 내게 와서 하신다는 말씀이,
“너, 이럴랴고 여기 왔냐?” 하신다
아니, 이게 무신 아닌 밤중에 홍두깨두 아니구... 뭔 소리여 시방, 아니 저게 워때서...?
사실 다른 애들한테 한 마디도 안 하길래, 속으로 혼자 낄낄대며...
‘거 봐라, 쳐 먹고 놀드니 늬들 해 놓은게 뭐 있냐?’ 는 거 였는데...
아니, 어띃게 내게 이럴 수 있나? 올매나 많은 밤을 애태우며 만든건데...
‘난 이제 죽었구나...’
나는 순간 절망하며 주저 앉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서 식은 땀만 흘리고 있었다
졸업장 날아가는 모습이 노랗게 변한 하늘 위로 살랑이며 멀어졌다
그날 처음으로 밤길을 헤메봤다, 그때도 혼자서...
코스모스 입학을 해서 겨울이 오기 전의 다소 쌀쌀한 기운이 도는 그런 때였는데
나는 여지껏 인생 살아 오면서 그때같이 추워 본 적이 없다    
줄창 다시 매달려 겨울의 문턱에 다다를 즈음 나는 기어이 일을 냈다
그 당시 나는 작업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학교 실기실 전체를 개인 작업장 마냥 썼다
그날도 저녁 늦게 추위에 떨며 한쪽 구석에 커다란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마무리 손질을 보고 있는데
뒤에 누가 있었는지 인기척이 나며 한마디 한다
“이게 니꺼 였냐?”
“예?”
나는 순간 낯익은 그 목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가뜩이나 추워서 얼은 몸이 다시 굳었다
한참을 바라 보시던 교수님께서 물끄러미 돌아서며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띄시고는 내게 이르시길...
“이걸로 개인전 해!”
나는 그게 무신 말인지 순간 몰랐고, 30초 뒤 돌아서 가시는 교수님 등 뒤에 인사를 했는지 마는지...
개인전? 개인전이라고라...
3학기 마치고 외국어 시험 패스하고도 통과할까 말까한 개인전 심사를... 1학기 말에...
정말 뜨악!!! 이었다
사실 그 늦은 시간에 교수님이 실기실에 오실 시간도 아닐 뿐더러 그 시간엔 그 건물엔 아무도 없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너무 가슴뛴다
그 교수님 지금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내가 작품 생활을 안해서 별로 뵐일이 없다
그러나 난 그때의 기억 하나로 젊음의 노트를 장식했다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고 오로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렇게 한 시험을 통과했고 나머지 시험만 통과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외국어 시험 통과하니 당장 개인전 할 돈이 문제였다
대관료, 도록 제작, 촬영... 억수로 들어 갈 돈이 문제였다
3학기 통과 후 학업을 과감히 중단하고 나는 취업을 했다
그때 들어간 회사가 잠실의 테마파크 ‘L’ 회사였다
드럽게 쎈 경쟁을 뚫고 들어가긴 했는데... 얘기 하기도 싫은 기억만 가득안고 다닌 회사다
그중에 독일에서 공부한 한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양반 이모가 독일에서 닥종이 인형공예로 유명하신 분이라고 했다
어쨋던 상당한 재능이 있었고 그 선배의 남편이 영어 교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선배와 나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 전철로 오가며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어쩌다 논문 얘기가 나왔는데 영문 초록을 번역해 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짧은 영어 실력에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부탁했다
국문 초록을 작성하고 나서도 글의 뉘앙스가 잘 전해지지 않아 대부분 애를 먹는데
미대 출신의 남편이니 걱정없이 해내리라 여겼다
그 신세를 어떻게 갚을 길이 없었는데 20여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이제사 연락을 했다
‘내가 참 무심한 놈이지...' 싶다


올해 고 3 이니까 꼭 13년 전 일이다
그때는 내가 직딩시절을 마감하고 내 사업을 한답시고 나름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큰놈이 초등 1학년 때의 일이니까 무척 오래된 이야기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집에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큰놈이 문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고 서 있었다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을 보내는데 쭈삣거리는 폼이 나를 나오라는 신호같아 마당으로 나갔다
그러자 열린 대문 사이로 빼꼼이 고개를 들이미는 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제 막 젖을 띤듯한 강아지가 우리 애 옆에 앉아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뭐냐?”
“응, 아빠 얘가 있잖아, 저기서부터 따라왔다!!”
“뭐? 저기 어디?”
“응, 학교”
“학교?”
“응, 학교 앞에 오는데 얘가 갑자기 나타나서 날 따라 오잖아, 오지 말래두 자꾸 따라와서 그냥 같이 왔어”
“너, 진짜야?”
“진짜라니까, 얘한테 물어봐두 돼!”
잠시 망설이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나는 큰놈 말을 1% 도 믿지 못하지만 우선 조리있게 심문해 보자는 속셈으로...
집요한 나의 추궁을 견디다 못한 큰놈이 막 울먹이기를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나의 심문은 끝이 났다
결국 내가 포기하는 걸로 결론을 내고 한 식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의 내력으로 볼 때 동물은 사람과 분명히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게 나의 상식이었다
키우는 거 허락하는 대신 집안은 안되고 마당에서만 키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애들이 셋이다 보니 애들의 정서적인 사항도 고려를 안할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시골 한적한 곳에서 도시의 찌든 환경을 안보며 키우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기엔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만 특히 나를 자극한 것은 돈 문제가 컷다
빨리 돈 좀 벌어 지방으로 뜨자... 가서 도자기나 실컷 만들어 죽기 전에 개인전이나 한번 더 하자...
이 목표가 나의 인생 지표이자 종착점이었다  
그런데 이녀석이 들어 온 후로 집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우선 애들이 지들끼리 매사에 다투던 것이 사라졌다
한마디로 애들의 칭얼거림이 눈에 띄게 없어진 거다
둘째의 칭얼거림은 매번 나의 인내심을 한계점에 이르도록 했는데...
자기들끼리 서로 밥을 챙기고 쉬를 챙기고 이녀석을 기준으로 모든 게 결정이 났다
어디를 한 번 가려해도 이녀석의 식사가 먼저 문제가 되었고
이녀석의 잠자리가 잘 챙겨지는 계획이 수립되어야 어디를 가서 자고 올래도 잘 수가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몇 날 몇 일을 고민했다
하루는 일을 정리하고 집엘 갔더니 이녀석의 이름을 지었다며 나를 붙잡고 세 놈이 난리가 났다
‘꼭숨이’
어디를 그리 빨빨대고 다니는지 도데체 찾기가 쉽지 않다고 꼭꼭 잘도 숨는다는 뜻이란다
애들이라 이름 짓는 것도 순수하기만 하다
나야 애들만 좋다면 괜찮다는 입장이나 그래도 거리가 좀 느껴짊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들을 위해서 나의 개인적인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참기 힘든 상황이 종종 생겼다
집안 곳곳이 짐승털로 도배가 되더니 심지어 밥 먹는 밥상에 까지 개털이 날렸다
예전엔 상상도 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애들과 마누라는 좋아 죽는단다
애들이 안보는 곳에서 꼭숨이가 나를 만나면 그녀석은 슬슬 내 눈치를 보며 피했다
안 피했다간 나의 손찌검 발찌검을 당해야 하니까
가끔 방 안에 올라와 있다가 내게 걸리면 사정없이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왜냐하면 아무리 못난 나도 짐승과 한 이불에서 지낼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으니까
하도 그렇게 자기를 구박하니까 그녀석 눈에는 내가 아마도 악마로 보여졌으리라
아무리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의 우리 가족은 아버님께서 너무도 황망히 떠나셨기에 우울해 하시는 어머님을 위해
살던 집을 급히 처분하고 부모님댁에 의탁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집이 처음부터 부실하게 시공되기도 했지만 오래 되어 사방이 물이 샜다
참다 못해 내가 업자를 불러 옥상 방수를 했다
그놈의 방수업자가 일을 마쳤으면 쓰레기도 함께 처분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석이 그만 통에 남아있던 약품을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셨던 모양이다
며칠을 고통 속에 보내더니 그렇게 우리 곁을 소리없이 떠났다
애들이 그녀석과 몇 년을 같이 커 와서 가족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그런 고로 그녀석의 사망은 애들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세 녀석이 모두 패닉 상태였지만 나는 좀 달랐다
다만 그녀석이 약품으로 인한 죽음을 맞은 것이 조금은 애석했고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저 동물 하나가 우리 곁을 훌쩍 떠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석의 장례문제로 나는 또 다시 애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을 하다 내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도 귀한 우리 애들의 정서 함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녀석인데... 그래서 장사를 잘 지내줘야 했다
한편 그녀석에게 너무도 고마워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걸 늦게나마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애들과의 전쟁이고 뭐고 일말의 속죄의 마음이 나를 울적하게 했다  
근처 동물 병원이나 인터넷을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상당한 비용을 요구했다
다른 이들의 경우를 전해 듣자니 별별 경우가 있기도 했다
사실 가족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면 그깟 비용 얼마나 되냐?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좀 그랬다
그래서 근처 산에 묻어 줄까 하다 그녀석이 물을 대단히 좋아했던 기억에
개천가 양지 바른 곳을 찾아 묻어 주었다

이녀석과의 추억 중에 잊혀지지 않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이녀석이 아무의 허락도 없이 바람을 피웠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바람이 아니고 벌건 대낮에 낮걸이를 했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어릴적에 우리와 인연이 닿았다가 성년이 다 되어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동물에게도 사춘기가 있는가 보다
관계가 깊어져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집안의 어느 누구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을 그일을...
한참이 지나 배가 불러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녀석의 일을 눈치채게 되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쩌랴 ‘이미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는다고 하나가 되랴’ 하고
묻어 두고 기냥 출산을 시키기로 결정을 봤다
아마 네 마리를 낳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중의 한 마리만 남기고 출가를 시켰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꼭숨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한참 재롱을 떠는 녀석을 하나 우리에게 안기고 그렇게 말없이 정든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나야 그때도 뭐 그일이 슬픈지 좋은지 모르고 세상 살이에만 열중했던 때라 기억조차도 희미하지만...
애들이 커서 이제는 공부에 신경 쓸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서 나는 안식구에게 채근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것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만 놔뒀다가 지 밥벌이 할 즈음 내 보내자고...
하도 거세게 몰아 부쳐서인지 실로 오랜만에 내말이 씨가 먹혔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되어 내 보낼려고 하는데 애들에게 둘러댈 방법이나 명분이 딱히 서질 않는 것이었다
난감해 하다 우리 둘은 좀 억지 같지만 나름 치밀한 작전을 짰다
애들이 모두 학교 간 사이에 처리하기로...
다름 아닌 가출을 명분으로 하기로 했다
광명 집에서 그당시 금천구의 가게까지는 차로 30여분 거리였으니 상당한 거리다
출근하면서 중간 어디 쯤 내려 놓기로 했다
어짜피 제 엄마도 우리 집으로 처음 올 때의 신분이 유기견이었으니까...
운 좋으면 좋은 사람 만나 잘 지내리라 여기고 기도나 잘 해주자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처리를 하고 우리는 까맣게 그일을 잊고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싶었는데...
약 6개월 즈음 지나서 우리 집앞에 그녀석이 와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을 막내가 발견하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당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지 못 할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어느 누가 이일을 믿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우리 곁에 다시 나타난 그녀석을 나는 얼마안가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다시 방출했다
그렇게 두 번째 가출을 가장해서 내 보냈는데...
한 달만에 그녀석을 늦은 퇴근 길에 도로에서 마주쳤다
나는 안식구와 차안에 있었고 그녀석은 건너편 길에 있었다
그당시 내 차가 엄청 고물이라 엔진 소리가 좀 특이했었나 보다
한밤 중 인적도 없는 야심한 시각에 신호대기에 서있던 내차를 보고 길 건너편에서 바로 무단횡단으로 달려 들었다
나는 처음엔 몰랐는데 뒷차가 크랙션을 요란하게 울려대서 알았다
이럴수가...
나는 놀라서 아니, 죄책감에 그녀석을 문을 열고 다시 받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떨어진 직진 신호를 핑계로 마구 속도를 내서 그곳을 벗어났다
죽을 힘을 다해 쫒아오던 그녀석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동정으로 애들의 장래를 무시하고 나는 그녀석을 다시 받아서는 안되었다
당장은 좋을지 모르나 애들이 너무도 그녀석을 붙잡고 씨름하는 통에 아무 일도 하질 못했다
안식구만 속을 끓이느라 죽을 맛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 결정은 잘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날 밤에 있었던 나의 도주극은 나의 뇌리에서 더 깊은 상처로 남았다
‘내가 죽일 놈이지...’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그래서 다시는 동물과 인연을 맺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키울땐 좋으나 이별할 때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지...
그렇게 무심한 시간이 어찌어찌 흘러 어머님 댁에서 약간 떨어진 지금의 우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안식구가 길에서 위의 애들의 엄마인 지금의 ‘2대 꼭숨이’를 데려 왔다
역시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놈을 길에서 발발 떨고 있는 놈을...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절망했다 아니, 이승에서의 인연도 인연이지만 이 무신 악연이란 말인가?
이제 애들도 커서 고교 입시를 치를 나이도 됐는데...
이녀석도 그렇게 얼떨결에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이녀석도 마당에서 키우는 조건으로 했다
그러나 몇 일 안 되어 사단이 났다
이녀석의 털이 온집안에 날라 다녔던 모양이다
예전 어머님 댁은 우리만 살았으나 지금 집은 3층에 우리가 살고 2층,1층 모두를 세를 놓고 있었다
우리가 나중에 이사를 와서 먼저 있던 세입자에게 주인 행세를 하기엔 좀 그랬다
그러던 차에 꼭숨이 사건이 터진 게다
털 좀 날리면 어떻냐고 따져도 되었지만 괜히 쥔 행세 한다고 할까봐 말도 못하고
우리는 조용히 집안에서 키우자는 결론을 내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 되었다
집안으로 들이고 나서는 이번엔 안식구가 좋아서 난리였다
갑자기 내가 찬밥 신세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내 처지가 안식구의 관심에서 멀어짊을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되었다
다이아나가 파멜라의 개입을 두고 셋이 지내기에는 버킹검 궁의 침대가 너무 좁았었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그녀석이 암놈이니 나는 둘을 상대로 각기 다른 애정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전에 있던 1대 꼭숨이는 내 화풀이 대상이었지만 이녀석은 안식구의 총애를 받고 있는 서열이 나보다 위였다
이름도 1대 꼭숨이와 같은 종류라서 애들이 그냥 그렇게 부르자고 해서 지었다
안식구와 그녀석을 상대해야 하는 나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서열에서 밀려난 나는 아무 받아주는 이 없는 공허한 바램만 안고 지내야 했다
이녀석도 먼저 놈과 마찬가지로 사춘기가 왔었다
혼전 임신을 한 차례 거쳤고 애들 아빠가 누구인지 몰라 어디에다 하소연도 못하고 기냥 삭혔다
그런데 2년만에 그렇게 단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또 사고가 터졌다
이번엔 현장을 안식구가 목격해서 애들 아빠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미 지들끼리 저질러 놓을 걸 이제 와 으쩔 것인가?
위 사진 중 아랫 것을 자세히 봐 주세요
쟤 표정 좀 보십시오, 제가 복장이 터집니다
아주 배 째라입니다
두 번씩이나 혼전 임신을 했다면 넘이 알까 두려워서라도 고개를 못들 일인데...
저 표정이 무에란 말입니까?
먼저 우리와 지냈던 애들이 내게 시달림 받은 것이 죄값으로 돌아 온 것이라 싶어
그냥 속죄의 심정으로 견뎌 볼랍니다
예전엔 상상도 못했을 대접을 받고 있는 저들이 팔자가 좋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속죄의 마음 뿐입니다
그렇게 저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이 지난 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용서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 봅니다

엊그제 20여년만에 연락된 그 선배를 그분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무대 의상을 전공해서인지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였다
무슨 샘플을 만든다고 하며 과거의 나의 실력으로 조언을 바란다고 해서 갔다
넓직한 스튜디오 한 켠에 왠 진공관 도면과 앰프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의상 부자재들로 꽉 찬 작업장에서 예전 캐릭터 만들던 얘기를 주고 받으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영어 교사를 때려 치운 것인지 현재는 앰프 설계를 한단다
굉장한 후원을 받으며 미국의 오디오 쇼에 내 보낼 앰프를 만든다는 거다
앰프 신호를 울려주는 스피커를 만드는데 도와달라는 것인 모양이었다
누가 설계했는지 모양이 아주 고급스럽고 좀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양반은 나의 앰프 이력을 모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모양이야 어쨌던 우선 소리가 궁금했다
“저 앰프 소리 좀 들어 봅시다, 300b 라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진공관을 알아요?”
“아뇨, 잘 모르고요 전 진공관 안 듣는데요?”
“아니 글쎄, 우리 남편이 저걸 나보고 만들어 오라고 시켰는데... 내가 뭘 아나? 나보고 어쩌라고...”
렌더링을 보니 어떻게 주물러 터뜨렸는지 몰라도 도면대로 만들어 오긴 왔다
그런데 내부 마감이 문제였고 설계자가 2% 부족한 설계를 한 것 같았다
사정 사정을 해서 앰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예상대로 통의 울림이 내부에서 공진을 일으켜 왕왕대는 것이 소리가 말이 아니었다
“저거 얼마에 파실랴고 해요? 1억은 받아야 할낀데 쉽지 않겠네요...”
사실 1억은 나의 농담이었다
그런데 진짜 1억 받을랴고 만든 거란다
“판매 루트는 있어요?”
“줄 섰어!”
“그래요? 어디? 외국에요?”
“.......”
그런데 스피커의 마감은 이해가 되는데 내부 처리가 이상했다
한 참을 살피고 짧으나마 나의 점검사항을 그 양반의 자존심에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럽게 몇가지 지적을 했다
1억 받을랴는 게 확실하다면 다른 물품의 억대 가격 품질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를 했느냐고 물었다
예를 들어 억대 가는 자동차는 천대하는 차와는 비교도 안 될 성능과 품질을 지녔을 게다
이 점에 대해 설명 좀 해 달라고 했다
물론 스피커의 설계를 영국 왕립 어쩌구 하는 학교 출신의 어떤 디자이너가 했단다
척 봐도 새롭고 진짜 멋있게 처리 된 것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인정했다
그러나 외관도 중요하지만 오디오는 다른 것 무엇보다도 소리가 우선 아닐까?
그게 나의 오디오관 이다
안 그런가? 소리 듣자는 기계인데, 소리는 개판이고 외관만 번지르 하면 뭐하자는 거여?
소리 먼저 좋고 그 외 외관이나 부품이 정말 억대에 비견 되는 기품이나 품질을 지녔다면 좋은 거 아닌가 한다
잠시 나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고집을 좀 부렸다
아실만한 분이라서 길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식하리만치 원칙을 강조했다
어짜피 예전에 신세졌었으니까 나도 왠수 좀 갚아드리겠다고 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부르시라고 했다
그리고 고민하던 샘플에 대한 마감처리를 조언해 주고 왔다
그양반과 같이 근무했던 잠실의 그 회사에선 내가 뜻밖의 일을 했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엔 캐릭터라고 하는 사람이 쓰고 다니는 인형을 만들 줄 아는 이가 몇 없었다
간간히 수출을 담당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으나 무시할 수준이었고
압구정에 배우인 최불암선생이 후원해서 만든 ‘나무와 종이’라는 인형 만드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마리오넷트’라는 손 놀림 인형을 만드는 곳이지 큰 인형을 만드는 곳이 아니었다
거의 독학으로 몇 몇 스텝들이 머리를 짜내고 만든 것이 지금까지 사용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내가 당시 창작한 곰 디자인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당시 입사 동기 중엔 현재 뮤지컬의 정상이라는 최정*, 탭 댄스 잘하는 남경* 가 있다
그 외 여럿이 있으나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그들이 지금 나를 보면 모를지 모르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물론 공연팀 안에 같은 스텝이긴 했어도 나는 분야가 다른 무대 디자인 팀이었으니까...
그런데 웃기는 것이 내가 후임으로 가르쳤던 이들이 후일 방송국이고 다른 경쟁사로 이적해 가면서
자기들이 1세대라고 떠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나야 그곳을 그만 둔 이후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떠들던지 말던지였지만
그 내막을 아는 몇 몇 이들은 아직도 그때의 내 실력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선배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을때도 흔쾌히 내게 부탁을 했었던 게다
손으로 만드는 것은 공학적인 계산만 아니라면 사실 무엇이든 자신 있으니까...
하물며 좀 안다고 자부하는 소리와 관계된 것임에랴...


졸업 후 학위를 받고 나서도 이렇다하게 지도 교수님을 찾아 뵙고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못 여쭈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그때 다니던 잠실의 회사가 사실 오픈을 앞두고 들어 갔던지라 말도 못하게 바빴다
항시 마음에 걸려 했었는데 내가 경기도 박물관의 내부 설계 및 시공에 관여하게 되면서
교수님을 한 번 뵐 일이 생겼었다
그때 마침 무교동의 한국 관광 공사에서 개인전을 하고 계셨다
어렵게 찾아 뵙고 그간의 안부며 찾아 뵌 연유를 설명드리고 도벽 작품 시공에 대해 의뢰 건을 말씀드렸다
여러 정황상 교수님 이력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건이었으나 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러나 박물관의 예산과 그들만의 피치 못 할 이유로 다른 이에게 그 일이 갔다
대단히 죄송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벌인 사업도 아니고 해서 나의 직무적 한계점이라 생각하고 그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때 그 일이 연결 되었더라면 교수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을 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졸업 후 바로 작품 활동으로 이어졌으면 그것 같이 잘 된 일이 없었겠지만 내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지금 한다해도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 작품을 하려면 고독해야 하는데 지금은 고독은 둘 째 치고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다
어머니, 마누라, 딸 둘에 동물인 쟤도 암컷이니... 내가 고독할 새가 워딧어?
생각혀 보드라고 시방 이 상황에서 나가 고독허것냔말여...

‘역지사지’라고 했다
사실 내가 신세진 여러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제는 같이 몇 해를 부대낀 동물에게도 감사하며 이 글을 쓰면서 저녀석의 후손들을 시집 보내려 하고 있다
좋으신 분이 데려 갔으면 싶은데 이 글의 완성이 늦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먼저 분양이 되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이승에 왔다가 이같이 저마다의 사연을 남기고 또는 가슴에 품고 저승으로 갔겠지...

외국인을 무시하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멸시하는 명칭에 조롱하는 말투로 대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조선족’
이 무슨 저질스런 말인가!
조선 동포 아닌가? 아니면 재중 교포라던가...
일본에 있으면 재일 교포, 미국에 있으면 재미 교포라고 하면서
왜 중국에 있는 우리의 동족을 그리 멸시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거 일본의 병탄으로 조국을 떠나 한 많은 여정을 겪어가며 오늘의 역사를 이뤘을 그들에게 이게 무슨 짓인지
동남아인들이나 기타 우리 보다 경제가 못한 지역 사람들을 우리가 지금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담당해 주는 산업의 한 부분은 우리가 하지 않은 아니면 그들이 안 해주면 안 되는 일이 많다고 들었다
그들을 좀 더 배려하고 그들에게 감사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우리의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들에 대한 선긋기는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그런 짓도 우습지만 세상에는 우리만 잘난 게, 우리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근세 50년간은 세계적으로도 격동을 겪으며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했 듯,
우리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 뒤엔 우리를 도와 준 외국의 원조가 한 몫을 했다
우리가 외국인을 잘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얼마 전 엄청난 지진으로 피해를 본 아이티만 해도 우리가 50년에 겪은 전쟁에 우리에게 원조를 할 만큼
잘살았던 나라였으나 계속되는 지도층의 부패와 안일로 오늘날 세계 최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의 어린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를 법적으로 책임의 소재를 가려 처벌로 다스린다는 발상은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예전 우리는 3대 4대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자랐기에 어른을 알고 무엇이 올바르게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똑바로 알고 그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의 발전을 거듭할 수록 쌓여만 가는 물질 만능 주의에 젖은 이기심은
결국 인간성 상실을 가져왔고 앞만 보고 달리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는 우리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인가
모든 것이 예전 것만 좋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를 거듭해도 진정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교육이다
그래서 요즘엔 이런 생각도 든다
오디오 입문 초기에 순진하게 돈을 떼였거나 하던 그 일이 이제는 내가 고마와 할 일이라는 것에 감사한다
왜일까?
그들이 내게 사기를 쳤기에 나는 더욱 오기로 소리 찾기에 매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내가 갖고있는 소리에 대한 기준이나 감성이 적어도 하나의 나만의 개성이 아닌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또한 그들의 사기성이 한 몫 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감사한다
비록 많지않은 경우에 있어 돈도 잃고 거꾸로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이제는 억울하지 않다
내가 알게 된 것이 아무 쓸모가 없을지언정
오늘도 내게 연락이 와 나의 소리를 아니, 내가 만든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언제든 누구든 환영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세계를 자꾸 고집하며 나를 가르치려 든다
그가 틀려서가 아니고 자신의 생각만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태도가 나는 싫어서 부정한다

외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들은 얘기다
학부에 인문학 교수 중에 흑인 교수가 한 분 있었다고 한다
해마다 신입생 중에는 그 분에게 실수하는 그런 학생이 꼭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얘기의 내용은,
한 번은 본관으로 진입하던 신입생 둘이 하필 흑인 교수의 출근과 겹쳐 마침 같이 걷게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앞서가는 교수의 뒤를 따르며,
흑인에 대해 모멸감을 주는 대화를 교수에게 들릴 정도로 소리 크게 지껄이며 뒤따라 갔었나 보다
한 참을 가다가 갑자기 교수가 뒤로 돌아 보며 이렇게 한마디 했단다
“욕 하지마, 이 10 새야!!!”
한편 들으면 올매나 황당해 했을 그녀석들의 표정에 실소를 할 얘기이긴 하나
이 얘긴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 말을 우리보다 더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말하는 외국인이 많다
우리의 문화나 정서를 우리 보다 더 잘 알고 더 연구하는 외국인이 많아졌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거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구한말 선교를 목적으로 왔던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의 무지 몽매함에
한번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우리에게 봉사 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들로 인한 부작용을 야기한 것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그것을 악용하고 잘못 해석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100 여년을 몇 대에 걸쳐 우리 땅에서 살면서 우리의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기여를 하는 분들이 부지 기수다
이제 우리가 달라져야 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그런데 이같은 내 생각이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니,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지금까정 지가 무신 야글 한 겁니꺄?
ㅋㅋㅋ
강아지 얘기 써야 하는데 오랜만에 쓰다보니 씨잘데기 없는 야그만...
지송합니다,



지가 이자는 개학을 해서 좀 바쁩니다
글 마감이 늦어서 죄송하고요
혹시라도 이 글로 정신적으로 피해를 보셨다면 연락 주세요
지가 보상처리 차원에서 수기 치료를 좀 해 드리죠
011-842-7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