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

능동소자와 수동소자

by 항아리 posted Feb 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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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설날이 지난 뒤,
모동호인의 부름을 받고 놀러갔습니다.
불렀기 때문에 간 것이 아니라, 도대체 소리가 안잡히는 것 같으니 와서 소리 좀
들어봐 달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한 사람 보단 두 사람이 들어보는 게 문제해결에 더
수월하리란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듣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산으로
올라가 버려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긴 하지만...

동호인은 해상도는 좋은데...운운했지만, 수박 껍데기 핥아대는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 달디단 빨간 속살과 고소한 씨맛은 온데간데가 없었습니다.
거칠게 날뛰는 껍데기맛, 따지고 들으면 그렇게 날뛰는 소리도 아니지만, 그렇게
들리는 것은 역시 속살맛과 씨맛, 뼈맛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상도가 좋은 게 아니라 차갑고 거칠게 나서는 껍데기 소리 때문에 뒤에서 들려야 할
소리가 전혀 안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걸 해상도 좋다고 하는 건가...

그 동호인은 앰프 튜닝엔 엄청나게 겸손하지만, 스피커 부분엔 상당한 노하우와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소리가 참 들어주기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하니, 그 동안 스피커를 만져온 과정을
하나하나 말해주더군요.
코일의 종류와 헨리값, 패시브 콘덴서의 종류와 용량, 우퍼와 드라이버 간 음압을
조정하기 위한 드라이버의 직, 병렬 저항값 등등을 좌르르 풀었습니다. 통도 몇 번
바꿨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니,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심한 노력을 한 것 같은데 왜 현재 소리가...

이를데없이 안타깝다는 듯 그렇게 위로해 주고, 허락을 구한 뒤 모든 게 급한 17세 돌이가
뒷집 순이 치마자락 들추듯 앰프 뱃대지를 땄습니다.

스피커는 수동소자입니다.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천상의 스피커라 한들 앰프에서 무성의한 소리를 보내주면 대책 없습니다.
물론 앰프는 능동소자입니다.
적용한 시정수와 부품의 조합으로 소리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이래도 소리가 안되고 저래도 소리가 안되면 누구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할지는
일 초 이상 생각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뱃대지를 열어 보고 바로 닫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집에 돌아왔다가 제 방의 쓰레기들을 쓸어담아 다시 갔습니다.

앰프의 이 곳 저 곳 부품을 되는대로 마구 교체했습니다.
소리가 어떻게 변할지 짐작은 할 수 있어도 들어보기 전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두질 좀 해봤다고, 뭐나 되는 것처럼 중간중간 담배까지 피워가며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게 지져대니, 동호인의 얼굴엔 반신반의하는 가운데서도 기대감이
점점 짙어집니다.

담배연기 흩날리며 멋지게 인두를 거두고, 들어봅시다, 하니, 미리부터 나름대로 기분은
째집니다. 얼마만의 인두질인지...그것도 남의 집에서...

교체된 부품들에게 영향받은 앰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고, 동호인이 멍해진
얼굴로 저와 소리를 번갈아 쳐다봅니다.

드디어 나를 존경하기 시작했군, 정신병자처럼 제멋대로 생각하면서 만족스럽게 담배를
피워 뭅니다.

삼 년 걸려도 해결 못한 걸 잠시의 인두질로 해결하다니...
이런, 정말로 존경할 기세로 동호인이 그렇게 말합니다.
제 정신병이 그새 동호인에게 전염된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 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설마 그렇기까지야 했겠습니까.
척 하면서 인두질을 해댔지만, 아주 조금만 좋아졌을 뿐입니다.
다만 소리의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경우엔, 작은 변화도 큰 기쁨으로 착각될 소지가 큽니다.
듣다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만,
수동소자 열 번 건드리는 것 보다, 능동소자 한 번 건드리는 게 변화의 욕구에 더욱 잘
부합되며, 그게 올바른 순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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