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

가만 두니 너무 좋습니다

by 윤영진 posted May 3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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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업무에 바쁘고, 밤에는 계속 폭음의 연속이라 오디오는 가끔 전원만 올렸다 내렸다 뿐이고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지냅니다.
연장통은 만져 본 지 한참 되었고, 납땜 인두도 열받아 본지 꽤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일종의 '금단 현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디 만져야 되는데.... 내일 해야지!"
식으로 숙제로 남겨두고 마음 한켠에서는 늘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무 것도 만지지 않고 한달 이상이 지났습니다.
금단현상도 없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몇 군데 늘 불만이 있어서 신경 쓰이던 것이
자연스럽게 제 스스로 개선된 것도 아닌데 이젠 크게 불만을 안 느낀다는 겁니다.
마누라 얼굴에 기미 낀 것도 자꾸 보면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지....

불가의 말씀이 가다가 돌아서면 그 곳이 피안이라고 하더니
"소리를 더 좋게 해야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니, 딱 그 때부터 소리가 좋아졌습니다.
물론 소리가 좋아졌다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판단이나 평가가 아닙니다.
스스로 "부족한 것에 대한 관용이 생겼다."가 맞습니다.

어디가 소리가 쏘면, "그래! 후추나 고추가루를 음식에 처 먹는 게 바로 쏘는 맛 때문이다."라고
용서해 주고, 음이 어디 찌그러져 들리면, "나무도 조금 휘고 비틀린 것이 좋아 보이더라!"로
얼버무려 버립니다.
저역이 풀려 나오면, "북어도 두드려 풀어야 먹기 좋은데, 이빨도 시원찮은 내가 좀 부드러운 것이 뭐 어때?"로 넘겨 버립니다.

이미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해탈(?)한 고3 아들 녀석이 용서가 됩니다.
이 녀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타인과 비교해서 비난"하는 겁니다.
마눌님이 습관처럼 "누구네 아들은 ....."하면서 잔소리를 하면 출력관 과전류 먹은 듯이 벌겋게
달아서 폭발해 버립니다.

지금 껏 저도 제 오디오 기기를 그렇게 학대했습니다.
누구네 스피커는 저역이 어떻게 나오는데.... 식으로.
얼마나 열 받았을 지 이해가 갑니다. 만약 스피커가 말을 한다면,

"그래! 너 돈 많이 벌어서 그걸 사면 되잖아? 왜 안 되는 걸 자꾸 시키니?"....라고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사람들 프로필을 주욱 보면 "공부로 성공한 분들"이 대부분이더군요.

누가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으라고 했을 때 "사람"이라고 적었다가 맞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가장 어렵고 훌륭한 희망일텐데, 그 이유로 맞는 세상이니....

아들 녀석은 공부에서 해탈하고, 마눌님은 돈에서 해탈하고, 저는 오디오에서 해탈했으니...
집에 도가 철철 흘러 넘칩니다. ^^

물론 이 집안 앞으로 잘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