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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있었던 어떤 일, 후끈했던 순간

by 항아리 posted Jan 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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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일입니다.

 가까운 평택의 한 젊은 동호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웨스턴 일렉트릭 6L6 PP를 복각한 앰프를 들였는데 소리가 뭔가 이상하니 와서
들어봐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갔습니다.
 들어봤습니다.

 이상하긴 했습니다. 껍데기만 값싸게 날아다니는 소리가 났습니다.

 \"뭐냐, 이 놈은?\"
 \"(기억 안나는 모델명)을 복각한 건데 트랜스는 오리지날이라고 해서...\"
 \"오오! 오리지날 트랜스? 쎄게 줬겠는데...\"
 \"그런 말투는...믿을만한 분한테서 양도받은 건데...\"
 \"오오! 믿을만한 분. 오리지날 트랜스, 복각, 믿을만한 분, 그야말로 아름다운 조합이 아닌가.
뭔가 완벽한 느낌인데.\"
 저는 비꼬는 쾌감에 꽤나 오랜 세월을 스스로 길들여 온 비뚤어진 놈입니다.
 \"내부를 좀 봅시다.\"
 
 복각앰프의 내부를 봤습니다.
 눈부신 정성, 요즘 부품들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모두 옛 부품에 배선재까지
옛것들이었습니다. 저항과 콘덴서의 용량도 제 수준에선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 정도면 참으로 훌륭하고 갸륵한 복각품인데...\"
 \"그렇죠?\"
 \"소리는 어째 그 모양이란 말인가.\"

 결론은 났습니다. 앰프가 별 거 있나. 뚜껑을 닫았습니다.

 \"트랜스가 오리지날이 아니라고 볼 수 밖에 없네요.\"
 동호인은 펄쩍 뛰었습니다.
 일단 트랜스 깡통이 오리지날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 깡통, 원래부터
붙어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이는 웨스턴 일렉트릭 라벨...
 \"보십시오. 저게 어떻게 가짜란 말인지....\"
 \"껍데기는 진짜가 확실한 것 같은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야 알 수 없지요.\"
 동호인은 그야말로 망치로 머리를 맞은 사람같았습니다.
 그의 충격을 이해했습니다. 안쓰러움이나 슬픔이란 감정은 그런 경우에 적절합니다.
 
 한참만에, 정말 한참만에 동호인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이 물건을 넘긴 사람을 부르든가 우리가 가든가 해서 셋이 오순도순 우애좋게 둘러앉아
트랜스를 깝시다.\"
 \"트랜스를 까면....\"
 한때 심취하기도 했었던 도박의 충동이 쾌감과 함께 확 살아났습니다.
 \"내가 앰프가격을 판돈으로 걸겠소. 오리지날이면 내가 독박 쓰고, 가짜면 이 앰프의 원래주인이
피박 쓰는 거고, 그대는 구경만 하면 되는 거니, 이거야말로 그대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아닌가.\"
 \"그게...사실은...오래도록 친형처럼 따르고 지내온 사람이라서...\"
 그땐 제가 망치로 한 대 맞았습니다.
 \"으으으으음....이래서 내가 또 나쁜 놈이 되는 것인가....\"
 \"잠시만요.\"
 동호인이 자기 방에서 도망치듯이 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주인없는 빈방에 홀로 앉아 잠시 \'복각\'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복각, 참 웃긴 말입니다.
 그 말에 이미 진짜가 아니다, 가짜다, 가짜지만 진짜처럼 했다,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각이란 말이 바로 쓰이는 건 문화재 복각 정도일 것입니다.
 문화재의 가치를 지닌 옛 물건의 손실이나 유실된 부분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되살려내는
의미로써 복각은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그러나 오디오의 경우 복각이란, 영판 다른 부품들로 원형의 이름값과 회로만 차용하는 경우까지
포함하고 대개의 복각품들이 그렇습니다.
 
 동호인이 되돌아왔습니다.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전화해서 대놓고 물었더니 계속 말 빙빙 돌리다가 화내니까 안에 든 게 일본에서 복각한
트랜스라네요.\"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놈들이 트랜스 껍데기도 복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왜 껍데기는 오리지날로
씌웠다는 것인가.\"
 \"일본 애들은 오리지널 웨스턴 코어에 오리지널 방식으로 감아서 오리지널 하고 다른 게
하나도 없다는데요. 오히려 코일이 새 거고 함침방식이 개선되어서 오리지널 보다 더 낫대요.\"
 \"일본놈들이 복각한 게 오리지날 보다 낫다는 개소리를 오늘 여기서 다시 또 듣는구나.
그놈들 게 과연 그렇다면 새 모델을 제시하지 왜 굳이 옛 명성과 이름값을 팔아 스스로를 낮춘단 말인가.
일본놈들이 겸손하다더니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구나.\"
 \"에이, 씨바랄....\"
 동호인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동호인은 즉각 웨스턴 일렉트릭의 6L6pp를 \'복각\'한
모노모노 두 덩이를 싸들고 오래된 형제같은 분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형제처럼 지내온 두 동호인의 사이를 박살낸 나쁜 놈이 되었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앰프들을 보고 그 앰프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어느 정도가 들었는지 알게 됩니다.
 눈으로는 까보기 전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로는 까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귀의 무서움이고 소리의 무서움입니다.
 
 어떤 포장을 씌우고, 어떤 온갖 달콤한 언어들을 갖다붙여도 소리는 자기가 지나온 경로를
그대로 담아낼 뿐입니다.
 지나온 경로에 적용된 부품들의 개성과 특성과 품성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소리를 통해 그것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