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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스키 전설() - 부품들과 연주자들, 그리고 혁명

by 항아리 posted Aug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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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스키는 주로 자기의 지휘를 녹음한 음반들을 들었다.
 이 늙은 지휘자는 자신의 지난 행적을 돌이키면서 그 과정에 필연처럼 스민 마음의 찌꺼기와 걸림으로 남은
마음의 재고들을 점검하고 정리하고 싶어했다. 용도를 다해가는 육신에서 홀가분하고 미련없이 빠져나가려는
준비를 하는 것과 같았다.
 하나의 인간으로써 그런 마무리, 그런 죽음만큼 멋진 것은 또 없을 것이다.
 가이스키가 가장 많이 연주한 것들은 쇼스타코비치,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의 음악들이었다. 거기엔
명연으로 널리 알려진 연주들이 다수 있었다.
 어느 날은 같은 곡을 하루종일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그 날은 쇼스타코비치 7번, 일명 레닌그라드가 반복되었는데 너댓번째쯤 되돌고 또 다시 되풀이 될 때였다.
 "저것들이 뭐하는 것들인지 알고 싶군."
 가이스키의 눈은 진공관 앰프들에 머물고 있었다.
 "진공관 옆에 붙어있는 것들 말이야. 그 안에 붙어있는 것들도...."
 기술자의 눈에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붙어있는 것들 전부요?"
 "그렇지. 전부."
 "알아서 뭐하시게요? 이젠 정말 직접 모든 걸 다 만들어 보시려구요?"
 "내가 지휘를 한다고 모든 악기를 다 연주하냐? 새낀 말도 안되는 얘길 묻고 있어."
 가이스키의 늙은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하지만 알아야지. 이 놈은 어떻고 저 놈은 어떻고 다 알아야지. 그래야 지휘를 하든 지뢀을 하든 할 거 아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새꺄. 니가 저기 진공관을 만들었냐, 아니면 그 옆에 붙은 부품들을 만들었냐. 우리 애들이
구해온걸 조립한 것 뿐이잖아."
 "조립? 말 다한 거유?"
 "기분 나뻐?"
 레닌그라드가 공산당의 붉은 깃발들이 행군하듯 씩씩하게 달려나가고 있었다. 저절로 흥분이 고조되는 대목이었다.
 "그러는 영감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직접 낳고 키웠소? 모두 딴 데서 자기 연주를 배우고 익힌 사람들을 영감이
모아서 그저 조그만 작대기 하나만 휘저은 게 다지. 나도 하겠네, 그런 건."
 "조그만 작대기? 아니 저 개샠이...."
 "당장 낱낱이 해체하겠소. 영감이 옆에서 모조리 구경했으니까 영감이 다시 조립하쇼."
 기술자는 흥분했다. 가이스키도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제는 왠지 즐기는 느낌이었다.
 "사람에겐 임마, 제각각 자기 영역이 있고 자기 분야란 게 있는 거야, 새꺄. 어른이 물어보면 앗, 저 늙은이가 내
분야를 묻는구나, 기뻐하면서 옛, 옙, 척척 대답을 하면 되는 거 아냐. 잘난 체 할 기회만 오면 덥석 물어대던 놈이
오늘은 왜 질알이야 질알이."
 행군이 끝나고 레닌그라드는 다시 느려지고 가라앉고 있었다.
 "내가 영감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대해 묻지 않았으니 영감도 저기 들어간 부품들에 대해 묻지 마십시오. 내가
영감의 음악을 듣기만 하는 것처럼 영감도 저기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소리가 다 말해주는데
쓸데없는 얘기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 샠...나 몰래 싸구려 부품 썼구나. 많이 남겨 먹을려고...."ㄴ
 가이스키가 야비하게 웃었다. 기술자가 욱 하는 얼굴로 가이스키를 노려보았다.
 "귀 먹으셨소? 이 소리 중에 싸구려 소리를 찾아보시오. 어느 한 군데든 이상한 놈이 들어가 있으면 그 놈이 반드시
표를 내니까."
 가이스키가 히죽 웃었다.
 "역시 그렇지? 바로 그거야. 내 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문득 저 놈들이 내가 지휘했던 그 단원들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야. 어느 한 녀석 하나 중요하지 않은 녀석이 없거든. 저기 진공관이 가장 눈길을 먼저 끌고 나 또한
그것에만 신경을 썼으나 차츰 그 옆에 붙은 녀석들이 보이더라구. 그러더니 이젠 모두 동등해 보이는 거야. 아...
저 놈들이 한데 어울려서 이런 화음을 내는구나, 그런 느낌이 온 거지."
 기술자가 빈정댔다.
 "어이쿠, 대단한 발견을 하셨네요."
 "진지할 땐 좀 진지해져, 새꺄. 저런 부품들을 어떻게 골랐나? 저 부품들 하나하나의 특성과 품성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 아닌가. 내가 단원들 하나하나의 개성과 실력을 꿰지 못하면 원하는 화음과 연주를 끌어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은근슬쩍 낮게 묻어가려고 하지 마쇼. 영감님이 나같은 놈 보단 훨씬 대단하고 위대하다는 걸 영감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도
알고 땅도 알고 하늘도 아니까."
 조립이란 말에 발끈했던 기술자는 좀 풀어지는 듯 했다. 가이스키는 웃음을 깨물었다.
 "많이 삐쳤던 거구나, 샠...너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 너 정도면 인정할만 해. 아니, 인정해주지. 이제 그간 들인
노력과 정성에 대한 수고비를 말해라. 이쯤에서 정산하자."
 "영감이 알아서 주쇼."
 "내가 알아서? 1원 주면 어쩌려고?"
 "어쩌긴요. 어쩔 수 없지요."
 "무슨 계산이 그러냐?"
 "얼마 달라, 그러기 어려워요."
 가이스키의 얼굴이 여러차례 바뀌더니 이내 심각해졌다.
 "너 이상한 놈이로구나."
 기술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엔 별별 인간들이 다 있지. 옛날에 말이야, 내가 한 악단을 꾸려가고 있을 때였지. 어느 돈많은 부자가 야외에서
거하게 생일파티를 벌여놓고 우리 보고 와서 연주를 해달라고 한 적이 있지. 그때 우린 너나할것없이 어려울 때였어.
연주도 뭘 먹고 입어야 하는 거지, 헐벗고 굶주려서야 되나 그게. 그래서 작지 않은 도움이 되겠구나, 기대하고 갔지."
 가이스키는 그때를 다시 기억해 보려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눈을 몇 차례 꿈뻑였다.
 "정말 호화로운 생일잔치였어. 명망있는 축하객들, 사치스러운 음식들...우린 정말 열심히 지휘했고 연주했지. 연주가 끝난
뒤 우리도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었어. 난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도 적지 않았어. 그리고 마지막에 봉투를 받았지. 지금까지
들어본 연주 중 최고였다느니 앞으로 세계 최고의 악단이 될 것이라느니 칭찬을 하면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태도로
봉투를 건네는데...뭐 열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지. 정말 기뻤어. 당분간 잘 먹여가면서 연습을 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게..."
 가이스키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돌아와서 열어보고는....죽고 싶었어. 그때만큼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아...이게 돈많은 자들의
행태구나...이래서 저들이 많은 돈을 가질 수 있었던 거구나...처절하게 느꼈지."
 기술자는 빔관들이 천대를 받아서 더 끌린다고 했던 가이스키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나 지금 부자야, 임마. 돈 많다구. 사람 봐가면서 하라구. 칭찬만 실컷 해주고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구."
 기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그들에겐 돈이 모든 것에 가장 우선 하지요. 그들은 마음도 돈으로 계산합니다. 입으로 꺼내는
말은 돈으로 계산하지 않아요. 입은 언제나 풍성하고 풍족하지요. 하지만 아음은 쥐꼬리만큼 씁니다."
 기술자는 빙그레 웃었다.
 "알면서도 모른 체 넘어갑니다. 저는 그들의 돈을 그들의 마음으로 거꾸로 계산합니다. 마음이 덜 오면 제 마음도 덜 갑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모든 관계는 결국 거래입니다. 그건 전 우주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입니다. 저라고
거기선 예외일 수가 없어요."
 기술자는 진공관 앰프들을 어루만졌다.
 "이 놈들은 제 마음입니다. 그리고 어디 있어도 제 마음을 따를 것입니다. 몇 푼의 돈을 아낀 자들이든 없는 돈을 애써 털은
사람들이든 나중에 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거래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지요."
 "오, 이 개샠, 뭔가 심오한 척 하지만 당장 배고픈 건 어쩔겨? 처음부터 알아봤지만 잘 먹고 잘 지내는 놈이 아니란 게 딱
표가 나, 너란 놈은."
 기술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건."
 가이스키가 키득였다.
 "쉽샠, 고단수인데...까딱하면 오늘 제대로 털리게 생겼는걸."
 기술자는 대꾸하지 않고 오디오를 바라보며 다른 소리를 했다.
 "레닌그라드의 끝은 왠지 모르게 우울하네요. 쇼스타코비치는 혁명이 결국은 실패할 것이란 예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혁명엔 실패가 없어.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는 게 혁명이거든. 보게. 진공관에도 빔관들이 꿋꿋이 버텨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제 소리를 뽐내고 있으니 이것도 혁명인 거야."
 "그렇습니까?"
 반문하는 기술자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자넨 혁명엔 비관적인가?"
 "우리 대한민국이든 영감의 러시아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어디냐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디서 살든
무엇을 하든 결국은 사람이지요. 결국은 사람들 개개인의 품성과 공부가 사람세상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영감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이 앰프의 부품들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다함께
어울릴 준비가 되고 있는가, 됐는가,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겁니다."
 기술자는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기 공부와 타고난 품성을 닦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박탈된 세상이나 다름없지요. 혼란스럽고 헷갈리게 하는 매체들이 도처에 널렸고 거기서 쏘아대는 헛된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넘쳐흐르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에 홀리고 팔려서 기꺼이 투신하고 노예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더군요. 비관이 아니라 저는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가이스키는 다시 심각해져서 낮게 신음했다.
 "넌 실컷 그렇게 봐. 난 언제든 혁명은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 있고 그렇게 믿으니까."
 "영감님 윈(Win)."
 가이스키가 미친 놈처럼 웃으면서 고함쳤다.
 "네 놈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듣고 싶겠지? 하지만 난 아니다. 쇼스타코비치 5번 4악장을 듣자. 광포하게 질주하다가 가지런하고

정연하게 정리를 한 뒤 요란하게 혁명을 자축하고 드디어 성공의 깃발을 쾅쾅 내리꽂는 그 멋진 음악을 듣자. 볼륨을 한것 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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