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시꺼먼 놈들 - 오래된 오리지널 스피커 통이란 것

by 항아리 posted Aug 17, 20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스피커 통은 현악기로 치자면 몸통이라 할만할 것입니다.
 과르네리니 스트라디바리우스니 하는 악기들은 어지간한 사람의 몸값 보다 더 나가는 모양입니다.
 거기서 굳이 중요도를 따지자면 역시 몸통이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현악기의 줄이나 활도 중요도에서 밀리지 않겠지만, 오래된 명기의 전설은 과연 몸통 제조에 몰려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기 얘기고,
 스피커도 과연 그럴까 입니다.

 

 스피커로 치자면 중요도의 앞줄에 서는 것은 늘상 알맹이들입니다.
 스피커 알맹이, 중요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저 보고 지금 사용하는 것보다 더 나중에 나온 스피커 알맹이를 쓰라고 하면
저는 0.1초도 생각하지 않고 즉각 강력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은 알맹이일수록 더더욱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일단 알맹이 나이가 많고 봐야 하는겨. 늙은 알맹이는 마법을 부리지. 그 느낌 알거든.

 

그리고 그 다음은, 돌대가리답게, 통은 걸리는대로 아무거나 써도 될걸,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가리는 돌이어도 귀는 돌이 아니어서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건,
 첫번째 사진의 시꺼먼 녀석 때문입니다.

 알텍의 가장 초기형 통 중의 하나인 810이란 놈입니다.

  첫 인상은 이 새끼, 비겁하다, 였습니다.
 양옆에 그것도 모자라 위까지 날개를 매단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고무신 신고 무명옷에 농기구 들고 전장에 나선 의병들 틈에서 혼자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말을 탄 장수와 같은 모습이 연상되었던 것입니다.

 

 저렇게 하면 소리가 잘 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을 거 아냐, 저렇게 비겁하게 생겨먹은 놈이 또 있을까.
 
 과연 그랬습니다.
 810에서 소리가 터져나오자마자 우리집에선 무슨 짓을 해도 저런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낭패감 내지 열패감 비슷하게 엄습해왔습니다.
 뭔가 다급하고 초조해져서 810의 비겁함을 강조하며 열심히 깎아내렸지만 저 통의 주인장은 그럴수록 여유로운 웃음만 지을 뿐이었습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하세요. 부러운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옳지 않아요. 으으음하하하하...."
 
 저는 결국 고개를 떨궜습니다.
 단지 통 하나의 차이 때문에 이런 모욕을 겪어야한단 말인가, 자존감을 가지려 해봤자 우리집에선 결코 낼 수 없는 810 소리 앞에서는 부질없었습니다.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통 좃네. 조아. 하지만 난 저런 통 안 가질 거야. 줘도 안 갖고 말 거라구."
 "누가 준답니까? 줄 사람도 없어요. 얼마나 귀한 통인데. 으으으으으음하하하하하하......"
 으으으으으음......
 
 그 뒤로 저는 상당기간 절치부심과 암중모색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작 스피커 통 하나 따위 때문에....

 

 그런데 막상 통 아니면 더 신경쓸 것도 없었습니다. 마치 해야할 일의 마지막인 것처럼.
 
 제 능력에선 앰프나 네트워크는 더 이상 어찌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더 궁리하고 싶은 마음도 열의도 없습니다.
 오래된 부품들만 쓰다보니 같은 부품들이 반복되지 않는 덕분에 그 부품들 고유의 품성과 개성들이 저마다 맛볼만하며
그에 따라 동작도 조금씩 달라지고 그때마다 소리를 맞춰가는 즐거움이 작지 않아 지루하거나 식상할 일이 없습니다.

 그 재미로 이미 충분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바람둥이 녀석들이 있었는데,
 한 녀석이 다양한 체위와 그 체위들의 변화에 따르는 재미와 즐거움을 자랑하자,
 다른 녀석이,
 친구여, 그도 좋겠지만 매번 같은 체위일망정 할 때마다 상대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품성에 더욱 합당하지 아니하겠는가,
 덧붙이자면 상대가 바뀜에 따라 그에 맞춰 얼마든지 체위를 달리 할 수도 있는 문제니 체위를 앞세울 일은 아니지 않는가.
 했다는 것처럼.
 
 위 얘기는 매번 같은 부품으로 회로와 방식을 달리해 보는 것과, 매번 같은 방식일지라도 부품들을 달리 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몹시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
 빈티지를 좋아한다면 과연 매번 상대를 바꾸는 것이....오래된 부품들이 나날이 사라져가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아, 빈티지를 좋아하지 않아도 매번 상대를 바꾸는 것이 역시 나은가....
 
 어쨌든 절치부심과 암중모색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던 중에 드디어 제게도 시꺼먼 놈이 들어왔습니다.
 두세번째 사진, 825라는 놈입니다.

  새로 짜맞춘 게 분명한 하부 덕트가 있는 부분만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오리지날의 탈을 쓰고 있는 놈입니다.
 그릴은 원래 붙어있던 검은 비닐선을 엮은 망이 보기싫어 시내에 나가 스댕(스테인레스) 망을 구해 바꿔치기 했습니다.
 몇 군데 보이는 못질과 투박한 마감이 저 녀석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빛이 비춰질 때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검은색은 가히 예술적이라 할만 합니다.

 그리고 소리는.........(소리가 어떻다 저떻다 백날 떠들어봤자 소리를 말이나 글로 바꾸는 것은 결국 무의미한 것입니다.)

 

 스피커통에도 오래된 악기들처럼 명품과 명기가 있다고는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도 있다고 해도 눈치볼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직접 겪어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통은 어떤 통이든 그저 멀쩡해 보이는 놈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놈을 쓰면 더 좋다는 생각도 합니다.

 

 저 새낀 왜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하신들 어쩔 수 없습니다.

 

 소리만 더 좋아진다면 저는 얼마든지 이랬다 저랬다 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맞다는 쪽 보단 틀렸다는 쪽을 더 반가워하는 편입니다.
 필경 소리가 더 나아지는 방향이라면.

 

 아참, 체위를 바꾸든 상대를 바꾸든, 그 대상이 몸 쓰고 마음 써서 사랑해줄만한 녀석인가,
그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구해보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놈이 놀라울 정도로 드물지도 모릅니다. 애석한 일이지만......)
 

 
 


Articles

4 5 6 7 8 9 10 11 12 13